큰 나무든, 큰 바위든, 여하간 커다랗고 단단하며 한결 같은 존재라는 말에 토 달 이 없는 이름, 문학비평가 황현산(74)과 김인환(73). 사석에서 서로를 “너”라고 부르는, 수십 년 지기지우인 두 사람이 나란히 산문집을 냈다. 폭넓은 사상의 주유를 거름 삼은 문장이 빽빽하게 들어 찬 묵직한 책들이다.
불문학자인 황현산 고려대 명예교수의 ‘사소한 부탁’.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에서 얼마 전 물러나 암과 싸우는 와중에 펴냈다. 박근혜 정부 시절인 2013년 3월부터 2017년 12월까지 쓴 칼럼, 서평 등을 엮었다. 그 4년 동안 황 전 위원장은 분노로 온몸을 떨었다고 한다. 글 쓸 기회만 생기면 펜 한 자루 쥐고 맨 몸으로 싸웠다. 그러나 그의 문체는 이번에도 ‘자기 낮춤’이다. 소리지르거나 야단하지 않고 조곤조곤 끈덕지게 꾸짖고 설득한다. 황현산신드롬을 만든 ‘밤이 선생이다’ 이후 5년 만의 산문집이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글들을 시인인 김민정 난다출판사 대표가 ‘수작업으로’ 긁어 모아 정리했다. 책 제목은 한글날을 맞아 한글 사용 도구의 사소한 정비를 당부한 글에서 추렸다. “우리는 늘 사소한 것에서 실패한다”고 맺는 글이다. 사소한 부탁, 소원, 마음들에 그때그때 귀 기울이는 태도가 끝내 세상을 지킨다고 황 전 위원장은 부탁한다.
사소한 부탁
황현산 지음
난다 발행∙344쪽∙1만4,000원
“내가 아는 것의 반은 김인환에게 배웠다”(황현산), “그처럼 많은 지식을 소유한 사람을 잘 알지 못한다”(오생근 서울대 명예교수). 김인환 고려대 명예교수는 그런 사람이다. 국문학자 보단 21세기 선비라는 호칭이 어울린다. ‘과학과 문학–한국 대학 복구론’은 그의 첫 산문집이다. 강연록, 논문 등을 묶었다. 제목이 보여 주듯, 책은 ‘사유의 바다’다. 문학, 한학, 경제학, 통계학, 수학, 철학, 정신분석학을 넘나들며 현실을 비평한다. 읽기를 시도하려면 머리를 먼저 깨워야 한다. 읽어낸다면 눈이 밝아질 것이다.
과학과 문학 – 한국 대학 복구론
김인환 지음
수류산방 발행∙288쪽∙2만1,000원
‘정치’를 놓고 두 저자가 쓴 글. “성급한 사람들에게는 투표가 ‘어느 세월에’라고 한탄하게 하는 영원히 가망 없는 일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마침내 꽃 피는 난초 분들이 있고, 잘 자란 아이들이 있다. 마침내 깨어지는 벽이 있다. 그래서 투표는 역사적 무의식이자 그 거울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투표는 저 역사적 무의식의 세포를 바꾼다. 확실하다.”(황현산) “사람을 죽이는 내전보다 사람 대신 표를 죽이는 내전이 나으므로 정당제와 선거제는 유지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투사’들이 문제 중심의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평등 공리를 실현하는 ‘당 없는 정치’이다. 노예가 안 되려면 투사가 되어야 한다. (…) 투사는 완강하게 달랠 줄 아는 사람이다. 달랠 줄 모르는 싸움꾼은 추상적 보편성에 집착하는 얼뜨기 정치가에 지나지 않는다. 투사에게 필요한 것은 분노가 아니라 유머다.”(김인환)
최문선 기자 moons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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