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없이 영어로만 된 간판
옥외광고물 시행령상 불법이지만
사문화 상태로 단속·처벌 안 해
아파트 시설안내도 영어 표기 많아
“노인 등 정보 소외” 우려 목소리
‘Art Box, espoir, Lucky Factory, Hollys coffee…’
서울 종로구 혜화역 4번 출구부터 성균관대입구사거리까지 200m 남짓 이어지는 일명 ‘대명거리’. 28일 비바람을 뚫고 걸어가는 동안 마주친 간판들은 총 115개, 이 중 ‘영어로만’ 쓰여진 간판은 약 절반인 48개였다. 한글로만 쓰여진 간판이 54개, 영어와 함께 한글이 병기(倂記)된 건 13개다.
굳이 따져보기 전엔 별스럽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많은 ‘영어로만’ 표기된 간판. 그러나 옥외광고물등광고법 시행령에 따르면 이들은 명백한 ‘법규 위반’이다. ‘광고물의 문자는 원칙적으로 한글맞춤법,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 및 외래어 표기법에 맞춰 한글로 표시해야 하며, 외국 문자로 표시할 경우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한글과 병기해야 한다’(12조 2항). 그러나 사실상 단속이나 처벌이 이뤄지지 않아 법령 자체가 ‘사문화(死文化)’ 상태나 다름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조항 내 ‘특별한 사유’의 적용 범위가 애매하다 보니 상표법, 특허법, 디자인보호법 등 다른 법령과 충돌하기도 한다. 예컨대 상표등록 자체를 애초 영어로만 했다면 간판을 달 때 한글 병기를 하지 않아도 되는 ‘특별한 사유’가 되는 식이다. 게다가 1999년 한 차례 법개정이 이뤄지면서 5㎡ 미만 간판은 구청에 따로 신고하거나 허가를 받지 않아도 돼, 대부분 소규모 가게는 설치 시점부터 걸러낼 장치가 사실상 없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병기 원칙을 두고 해프닝이 잦다. 최근 한 네티즌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최근 신축 아파트로 이사가신 어머니가 Management Office(관리사무소), Senior Club(노인정), Library(도서관) 등 한글 병기 없는 시설의 영어 안내를 보고 무슨 뜻이냐며 사진을 찍어 보냈다. 노인들이 어떻게 ‘Senior Club’만을 보고 노인정을 찾아가겠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5월 부산지법에서는 한 치과 의사가 ‘병원 명에 한글 병기하라는 시정명령을 취소해달라’고 제기한 행정소송에 “모든 국민이 병원 명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라며 원고 패소 판결이 내려지기도 했다.
관련 시행령을 담당하는 행정안전부 생활안전정책과 관계자는 “‘특별한 사유’가 애매하다는 의견이 내부적으로도 있지만 시행령 개정까지는 구체적인 계획이 없다”라며 “사실상 단속이나 처벌이 이뤄지지 않더라도 한글 보호 측면에서 병기 조항을 완전히 삭제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정인환 한글문화연대 운영위원은 “간판은 도시 미관의 구성요소이기도 하지만 ‘정보 전달’ 역할도 크기 때문에, 노인 등 정보에서 소외되는 사람들이 생긴다면 문제”라며 “최소한 공적인 성격을 갖는 간판만이라도 한글 병기를 필수로 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한소범 기자 beo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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