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지내몰림서 탈출하려면… “차라리 힘 모아 건물주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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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지내몰림서 탈출하려면… “차라리 힘 모아 건물주 되자”

입력
2018.06.30 09:00
수정
2018.06.30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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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진구 지역단체 공유공간 ‘나눔’ 

 월세에 쫓겨 전전하던 지역단체들 

 회원 기금ㆍ은행 대출로 건물 매입 

 안정감에 지역활동 돈독한 연대도 

서울 광진구 지역공동체들이 힘을 모아 매입한 건물 공유공간 '나눔'의 4층 휴게실에서 박용수 광진협동사회경제네트워크(광사넷) 위원장과 '21세기자막단' 김빈(왼쪽) 대표가 대화하고 있다. 광사넷 제공ㆍ송은미 기자

“활동가가 월급 30만원 받을 때 임대료로 80만원이 당연하게 나가는 게 너무 아까웠어요. 직접 건물을 사는 수밖에 없겠다고 깨닫기 시작했죠.”

지방자치제가 시작된 1995년의 어느 날. 예년처럼 사무실 임대료 인상을 걱정하던 서울 광진구 내 지역운동 단체 대표들이 모인 자리에서 처음으로 ‘차라리 건물주가 되어 버리자’는 중의를 서로 확인했다. 월급은 밀려도 임대료는 꼬박꼬박 내야 했고, 계약기간이 끝날 때마다 임대료가 훌쩍 뛰어 짐을 싸기 일쑤였던 악순환이 너도나도 지겨웠다. 이사하면 비용도 걱정이지만 공간을 중심으로 쌓았던 유무형의 자산도 하루아침에 날아가곤 했다. “반지하의 열악한 환경에서 이제 그만 벗어나고 싶다.” 지역단체 회원들의 기금과 은행대출을 활용해 직접 건물주가 되자는 청사진. 광진구 시민단체들의 ‘시민자산화’ 밑그림이 그려지던 순간이었다.

 “차라리 건물주 되겠다” 공유공간 ‘나눔’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건물주가 되어 임대료 인상의 악순환 고리를 끊겠다던 그날의 다짐은 무려 15년이 지나서야 실현될 수 있었다.

2007년 광진구 지역단체 네 곳이 통째로 빌려 입주했던 건물의 주인이 갑자기 건물을 팔겠다고 선언했다. “위기는 곧 기회다.” 광진주민연대를 중심으로 '안전한 둥지만들기’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보증금 3억원에 회원들이 모은 3억3,000만원, 은행에서 빌린 5억7,000만원까지 합쳐 2010년 12억원에 드디어 건물을 매입했다. 이른바 광진지역 시민운동단체들의 ‘자양동 사옥시대’가 열렸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재개발구역에 포함돼 건물이 철거될 계획이라는 구청의 통보가 날아든다. 다시 ‘안전한 둥지만들기’ 시즌 2가 시작됐다. 박용수 광진협동사회경제네트워크(광사넷) 집행위원장은 “우리만의 공간에 대한 간절함이 너무나 컸다”고 했다. 건물을 매입해본 경험이 큰 자산이었다.

박용수 광진협동사회경제네트워크 집행위원장은 건물 매입은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이들에게 "건물가격의 10% 계약금만 있으면 가능하다"고 했다. 송은미 기자

지난해 중곡동 대로변에 위치한 지상 4층 지하 1층 건물을 매입하는 데 성공했다. 이전보다 연면적이 세배나 넓고 시장 초입에 위치해 지역활동가들이 교류하기에도 안성맞춤이다. 매입비용은 인테리어비 포함 36억원. 25억원 이상이 은행대출과 차입금이고, 나머지는 입주 보증금과 회원들의 기금으로 채웠다. 이전 건물을 매각하며 거둔 시세차익(6억원가량)의 도움이 컸다. “최초제안가에 팔았는데도 그 정도였어요. 당초 건물을 사지 않고 세입자로 남아있었다면 얻지 못했을 부분이죠.”

광진구 단체들과 회원들 사업체의 새 보금자리 이름은 공유공간 ‘나눔’이다. 광사넷 소속 주민연대, 주거복지센터, 생협, 병원(회원운영), 카페(자활기업) 등 15개사가 입주했다. 임대료는 주변 시세의 40% 수준이다. 과연 운영이 될까 싶었지만 놀랍게도 대출이자를 감당할 만하다고 했다. 공간을 더 촘촘하게 쓰면 원금을 상환할 여력도 생긴다. 건물 운영은 정기적으로 입주 단체들이 협의해 결정한다.

이전과 달라진 점을 묻자 박씨는 “건물을 사지 않았다면 월세에 쫓겨 근근이 살았을 것”이라고 했다. 안정적으로 사업할 수 있고 관련 단체들이 한데 모여 협업도 수월하다. 단체 사정에 따라 임대료 없이 품어주는 인큐베이팅 역할도 한다. 노인돌봄 사업을 진행하는 돌봄플러스협동조합은 예산에 임대료가 책정되지 않아 4층 일부를 무상으로 쓰고 있다. 한정림 매니저는 “전에는 도장 한번 찍으러 1㎞ 이상 거리를 자주 오갔다”라며 “이젠 문턱만 넘으면 되니 효율적이다”고 했다.

공유공간 '나눔' 4층에 입주한 돌봄플러스협동조합의 한정림 매니저는 "관련 단체들이 한 건물에 모여있어 사업 진행이 훨씬 빨라졌다"고 말했다. 송은미 기자

4층에 입주한 ‘21세기자막단’ 김빈 대표는 “‘아예 건물을 사서 층별로 이자를 부담하면 되겠다’는 논의를 하긴 했지만, 실제로 구현됐다는 사실이 아직 놀랍다”고 했다. 또 안정감과 돈독한 연대감이 만족스럽다고 했다. “2012년 창업 이후 이사를 네 번이나 했는데. 은행이자가 급등하지 않는 한 같은 조건으로 원하는 만큼 쓰라고 해서 안심이 됩니다.”

여전히 건물주가 되겠다는 도전은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이들에게 박씨는 “건물가격의 10% 계약금만 있으면 가능하다. 나머지 75%는 담보대출, 15%는 보증금으로 마련할 수 있다.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라고 했다. 광사넷은 소속 단체들의 사업장 마련을 위해 2년에 한 채씩 건물을 매입하는 게 목표다.

 강력한 젠트리피케이션 대응 ‘자산화’ 

임대료 급등으로 원주민이 쫓겨나는 둥지내몰림이 심화됨에 따라 공동 소유의 자산을 마련하는 ‘자산화 전략’이 주목받고 있다. 공유 자산을 마련해 시세보다 저렴하게 임대함으로써 세입자가 안정적으로 영업할 환경을 만들고 이를 지렛대로 주변 임대료도 안정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산화 전략은 젠트리피케이션을 억제ㆍ지연하는 강력한 수단으로 꼽히고 있다. 민간, 민관, 공공 모두 주체가 될 수 있다.

 # 자산화 전략, 민간ㆍ공공 모두 가능 

 공유 재산 마련해 저렴하게 임대 

 세입자는 물론 주변 시장도 안정화 

 일정 규모 초기자금 마련은 숙제 

광진의 사례는 민간이 주도한 경우다. 시민 공동 소유로 자산을 마련해 운영하는 구조로 외국에선 영국 해크니 개발협동조합이 대표사례로 꼽힌다. 해크니 조합은 방치된 건물을 은행 융자를 얻어 매입한 후 리모델링을 거쳐 영세자영업자나 예술가에게 시세의 70%에 임대했다. 프랑스의 세마에스트는 민간과 공공이 협력한 형태다. 파리시 산하 민관 합동 출자회사인 세마에스트는 11개 사업지구내 건물의 1층을 사들여 영세업자에게 저렴하게 임대해 젠트리피케이션을 방지하고 문화다양성을 보호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공공이 주도한 공공자산화는 공공임대상가를 조성한 뒤 저렴하게 임대하는 방식이 일반적이다. 서울시는 대학로 동숭아트센터를 매입해 연극인에게 저렴하게 빌려주고 삼일로 창고극장과 10년 임대계약을 맺어 예술인 창작공간으로 지원하는 사업을 추진 중이다. 기초자치단체들 가운데에는 성동구가 적극적이다. 성동구는 2015년 부영이 관광호텔 건축허가를 신청하자 용적률을 105% 늘려주고 45.1%에 해당하는 260억원 상당의 토지와 건물을 기부채납 받았다. 앞서 구청이 직접 매입한 안심상가 1호에 신촌에서 밀려난 공씨책방 등 4곳을 입점시켰고, 부영과 SK V1의 공공기여로 조성한 안심상가 2,3호는 영세업자에게 장기임대할 계획이다.

지난 3월 서울 성동구 성수동에 새롭게 자리잡은 공씨책방 장화민(왼쪽) 대표와 남편 왕복균씨. 강진구기자

자산화 전략의 최대 숙제는 일정 규모의 초기자금 마련이다. 부동산을 실제로 소유하려면 대규모 자금이 필요하기 때문에 장기 저리대출이나 신용보증 등 정책적 지원이 절실하다. 공유 자원의 소유 구조를 어떻게 취하느냐도 중요한 요소다. 전은호 나눔과미래 시민자산화사업팀장은 “최대지분자가 운영권을 갖는 구조는 위험성이 따르므로 1인 1표의 협동조합방식이 적합하다”고 했다. 이어 “수도권은 신설법인에 3배 중과세를 물리고 있어 좋은 목적이라 해도 협동조합이나 법인을 만들기 힘들다”며 제도 개선을 요청했다.

선한 부동산 투자회사인 공공그라운드가 매입한 대학로 ‘공공일호’의 3층에 입주한 대안학교 ‘거꾸로캠퍼스’ 학생들이 내 몸 사용법에 관한 수업을 듣고 있다. 공공그라운드 제공ㆍ송은미 기자

 

 착한 부동산투자로 젠트리피케이션 예방 

혜화역 2번 출구를 나서면 담쟁이 넝쿨이 감싼 빨간 벽돌 건물이 반긴다. 출판사 샘터의 사옥이던 이 건물의 주인이 지난해 바뀌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선한 투자를 목표로 하는 배수현씨의 부동산투자회사 공공그라운드다. “상속세 문제로 건물이 매물로 나온 뒤 여러 부동산 회사에서 관심을 보였다는 소문이 들렸어요. 일단 이 공간을 보존하자는 목적으로 매입을 진행했죠.”

 # 대학로 공공그라운드 ‘공공일호’ 

 상징적 건물 ‘임팩트 투자’로 매입 

 상업 임대ㆍ증축 등 유혹 뿌리치고 

 공간특색 보존하며 젊은층에 임대 

서울대 문리대 터에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해 내년이면 마흔 살을 맞는 이 건물은 역사적 가치를 지닌 대학로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러나 수익성을 최우선으로 하는 부동산 개발이 시작된다면 특유의 가치가 사라질 것이 불 보듯 뻔했다. 배씨는 “매입 당시 증축을 해라, 지하부터 옥상까지 상업임대로 채워라, 요즘 잘 나가는 방탈출카페를 들여라 등 얘기가 많았다”고 했다. 공간의 특색이 파괴되고 대형 상점만 남게 되는 ‘문화적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이다.

공간을 보존하면서 미래 세대를 위한 공간으로 재설계하자는 뜻에 공감한 이들을 대상으로 자금을 모았다. 약속한 적정 수익을 달성하면서 사회적 가치 실현을 목표로 하는 ‘임팩트 투자’ 방식이다. 일반 부동산투자의 기대수익이 연 7%정도라면 임팩트 투자는 2~3%대 수익을 얻으면 나머지는 그곳이 창출한 보이지 않는 가치로 만족한다. 매입비용 300여억 중 절반은 투자를 통해, 절반은 은행대출로 마련했다. 다음커뮤니케이션 창업자 이재웅씨도 투자자로 참여했다.

'공공일호'는 사내식당이었던 5층을 라운지로 조성해 입주사나 외부인도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공공그라운드 제공

공공그라운드가 모델로 삼는 곳은 1998년 영국에서 설립된 ‘에시컬 프로퍼티 컴퍼니(ethical property companyㆍ윤리적 부동산 회사)다. 영국 9개 도시에 공유 사무실을 마련하고 가치가 맞는 기업들에게 저렴하게 빌려준다. 주식 발행으로 자금을 마련하는데 시민들도 소액주주로 참여할 수 있다.

건물의 새 이름 ‘공공일(001)호’는 적정 수익을 거두면서 공공 가치를 만들어내는 수백 호의 건물 중 첫째라는 의미다. 도서관과 출판사 사옥이었던 건물의 역사를 살려 교육과 미디어 분야에서 플랫폼으로 기능하는 게 목표다. 그래서 3층에 입주한 대안학교 거꾸로캠퍼스와 4층 미디어 관련 업체들의 임대료는 주변보다 30%가량 저렴하다. 6층은 팟캐스트 스튜디오를 만들어 신청하면 누구나 쓸 수 있고, 사내식당이었던 5층은 라운지로 조성해 외부인도 공유할 수 있도록 했다. 스타벅스 등이 들어선 1,2층만 그대로 상업 임대로 뒀다.

대학로 '공공일호'의 6층에 마련된 팟캐스트 스튜디오. 공공그라운드 제공

거꾸로캠퍼스의 김광호 교사는 “대학로로 옮겨오면서 학생들이 문화 혜택을 듬뿍 얻고 ‘진짜’ 세상을 배울 수 있어 만족스럽다”고 말했다. 미디어벤처 메디아티의 투자를 받아 4층에 입주한 ‘왈이의아침식땅’ 노영은 대표는 “미디어스타트업들이 모여있어 서로 아이디어도 발전시키고 고민을 나누는 등 시너지 효과가 크다”며 “무상입주 기간이 곧 끝나지만 여전히 가격 이점이 있어 연말까지 머물 계획”이라고 했다.

대학로 '공공일호' 4층에 입주한 미디어스타트업 '왈이의아침식땅'. 송은미 기자

공공그라운드는 꾸준히 가치 있는 공간을 매입해 보존하고 새로운 공간으로 탄생시킬 계획이다. 배씨는 “여성이나 청년 문제의 솔루션을 찾는 공간에 관심을 갖고 있다”고 했다.

송은미기자 myso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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