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거 능력 인정받기 위해 강제 수사 가능성
대법원 법원행정처가 26일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사법행정권 남용 관련 컴퓨터 하드디스크 등 주요 물증을 빼고 자체 조사한 일부 자료만 검찰에 넘겨 파장이 일고 있다. 판사들의 조사요구가 한창일 때 양 전 대법원장 컴퓨터 데이터를 영구 삭제한 사실도 드러나 증거인멸 의혹까지 사고 있다.
대법원은 이날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등 핵심 연루자가 쓰던 하드디스크를 달라는 검찰 요청을 거부하고 “(사법행정권 남용과) 어느 정도 관련성이 있다”고 자체 판단한 410개 파일만 제공했다. 대법원 특별조사단이 확보한 하드디스크 내 34만여개 파일 중 ‘상고법원’ ‘국정원’ 등 의심스러운 키워드가 담긴 파일만 3만여개인 점에 비춰 보면 법원이 ‘셀프 조사’한 내용만 보라는 취지로 읽힌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사법행정 영역에서의 필요한 협조를 마다 않겠다”는 입장을 내놓은 것과는 사뭇 다른 조치라는 지적이다. 이와 관련해 대법원 관계자는 “검찰의 ‘투망식’ 자료 요청에 다 응한다는 건 법령 위반 소지 등을 고려해 어렵다”고 말했다. 구체적 혐의가 뭔지 모르는 상황에서 모든 자료를 다 확보하고 나서 혐의를 찾겠다는 검찰의 수사 방식에는 따를 수 없다는 취지로 보인다.
하지만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과 관련해 지난해부터 지난달까지 대법원이 세 차례 자체 조사하면서 의혹의 핵심 당사자인 임 전 법원행정처 차장 컴퓨터 미개봉 등으로 법원 안팎의 질타를 받고서야 찔끔찔끔 ‘하자’를 보완해 온 점으로 미뤄볼 때 진상규명 의지가 의심스럽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더욱이 검찰이 요청한 의혹 대상자 법인카드와 관용 차량 운행일지도 제공되지 않았다. 카드 내역은 당사자 동의가 필요할 뿐 아니라 자료가 워낙 광범위하고, 이메일은 통신 비밀 관련 사안이라 함부로 넘기기 곤란하다는 게 법원행정처 입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관용차량 운행일지는 혐의 관련성이 부족하다고 자체 판단한 것으로 전해졌다. 대법원 관계자는 “법령 위배 우려가 없는 범위 내에서 자료를 제공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검찰은 즉각 반발했다. 서울중앙지검 관계자는 “컴퓨터 하드디스크 원본을 확보하거나, 검찰이 직접 하드디스크 원본 이미징을 추출한 뒤 수사를 벌이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의혹 규명은 물론 향후 재판에서 증거능력을 인정받기 위해서라도 이 같은 방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검찰이 원본에 집중하는 건 ‘디지털 포렌식’ 등의 기법을 통해 확보한 자료라도 당사자가 작성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경우 재판에서 증거로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앞서 2015년 7월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 사건에서 425지논ㆍ시큐리티 파일의 증거능력을 문제 삼아 파기 환송하면서 이같이 판시했다.
이에 따라 검찰의 강제수사 가능성이 제기된다. 검찰 관계자는 “대법원에서 제출 받은 자료를 면밀히 검토, 진실규명에 필요한 자료 확보 방안을 찾을 계획”이라고 말했다. 게다가 양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 전 대법관의 컴퓨터 데이터 영구삭제 조치가 법원 안팎에서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이 고조돼 2차 조사에 착수한 시점에서 이루어져 강제수사 필요성이 더 커졌다. 한 부장판사 출신 변호사는 “핵심 증거가 될 수 있는 컴퓨터를 폐기한 건 대법원 측이 사태를 안일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안아람 기자 oneshot@hankookilbo.com
손현성 기자 hsh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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