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0월 블랙리스트 조사 진행 당시
조직적 증거 인멸 가능성 배제 못해
박병대 前 대법관 하드디스크도 지워
대법원이 ‘재판거래’ 의혹 정점인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컴퓨터 하드디스크 데이터를 지난해 10월 영구 삭제 조치한 것으로 드러났다. 대법원은 “통상 절차”라고 해명했지만, 하드디스크 폐기 당시 이미 양 전 대법원장의 ‘판사 블랙리스트’ 사건 조사가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조직적 증거인멸이 있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게 됐다.
서울중앙지검은 26일 “사법행정권 남용 관련 자료를 대법원으로부터 제출받았다”며 “양 전 대법원장이 사용했던 컴퓨터 하드디스크는 지난해 10월 디가우징(강력한 자기장을 이용해 복구 불가능하도록 자료를 완전히 지우는 것) 처리된 것으로 통보받았다”고 밝혔다. 하드디스크 데이터가 영구 삭제된 지난해 10월은 양 전 대법원장이 퇴임(9월 22일 퇴임식)하고 김명수 대법원장 체제가 들어선 직후다.
또 2014~2016년까지 법원행정처장을 지내며 재판 거래 의혹으로 양 전 대법원장과 함께 고발된 박병대 전 대법관의 컴퓨터 하드디스크 역시 디가우징된 것으로 드러났다. 박 전 대법관 컴퓨터는 퇴임(지난해 6월) 때 디가우징됐다.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의 핵심 최고위 인사인 두 사람의 컴퓨터 자료가 영구 삭제 처리된 데 대해 검찰 관계자는 “작년 10월은 블랙리스트 문제에서 국민들의 의혹이 고조돼 2차 조사가 착수된 시점으로 디가우징 경위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압수수색이나 관련자 소환 등 강제수사 필요성을 배제하지 않은 것으로 해석된다.
이에 대해 법원행정처는 “전산관리운영지침에 따라 대법원장과 대법관 컴퓨터는 디가우징 처리 후 보관하고 있다”며 “이는 다른 대법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고 밝혔다.
법원행정처는 사법행정권 남용 관련 자료를 모두 제출해 달라는 검찰 요구에도 응하지 않았다. 법원행정처는 이날 “공무상 비밀에 해당되지 않고 구체적 관련성이 인정되는 범위 내에서 필요한 자료를 준비해 서울중앙지검에 제출했다”고 설명했다. 법원행정처는 의혹과 직접 관련이 있는 410개 문건파일은 원본 형태로 제출했지만, 일부 파일은 개인정보 보호 차원에서 비실명화 작업을 거쳤다. 제출 여부를 두고 관심을 모았던 법원행정처 컴퓨터 하드디스크는 제출 대상에서 제외됐다. 법원행정처는 “제기된 의혹과 관련이 없거나 공무상 비밀이 담겨있는 파일 등이 대량으로 포함돼있다”고 미제출 이유를 밝혔다.
대법원이 ‘셀프 판단’으로 필요하다고 보는 자료만 제출함에 따라 김 대법원장이 15일 대국민담화문을 통해 “필요한 협조를 마다하지 않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손현성 기자 hshs@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