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서방 축하하네. 자네가 아빠가 됐어.” 1992년의 어느 가을 날 새벽 독일에서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무작정 170㎞ 떨어진 프랑크푸르트 공항으로 향했다. 젊은 배낭여행객이 기꺼이 비행기 좌석을 양보한 덕분에 열두 시간 후 자양동에 있는 산부인과에 도착할 수 있었다. 병원 밖에 나와 계시던 장모님이 내 손을 부여잡고 침통한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이서방 미안하네.” 나는 더 듣지 않았다. 눈물이 핑 돌았다.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아내가 누워있는 산후조리실로 올라가면서 아내에게 뭐라고 위로해야 할지 생각했지만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내는 지친 모습으로 나를 맞았다. 그런데 그 옆에는 아기가 얌전히 누워 있었다. 세상에나 이렇게 예쁜 아기라니… 아빠에게 안긴 아기는 불편했는지 잠에서 깼다. 엄마는 아기에게 젖을 물렸다. 와우! 내가 아빠가 됐다. 그런데 잠깐, 도대체 장모님은 뭐가 미안하다는 거지? 나중에 알았다. 맙소사! 아들이 아니라 딸이어서 미안하다는 것이다.
나는 딸인지 이미 알고 있었으며 그래서 좋았다. 나와 두 남동생을 생각하면 우리 집에 남자가 또 생긴다는 것은 재앙처럼 느껴졌다. 도대체 우리 부모님은 뒤스럭스런 아들 셋을 어떻게 키우셨는지 존경스러울 따름이다. 게다가 난자에 들어 있는 X염색체는 기본 옵션이고 추가 X염색체는 내 몸에서 나온 정자가 가지고 있던 것 아닌가.
우리 부모님도 겉으로는 “요즘 시대에는 딸이 더 좋아”라고 말씀하셨지만 속마음은 그게 아니었던 것 같다. 몇 년 후 내 동생이 아들을 낳았을 때 좋아하셨던 것을 보면 말이다. 심지어 마침내 당신 제사를 이을 손자가 생겼다는 말씀도 하셨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 부모님은 3남1녀의 자식에게서 모두 2남5녀의 손주를 얻었고 두 손자는 제삿날 할아버지에게 특별한 예를 갖추지는 않는다.
21세기 제4차 산업혁명 시대에도 아들 타령을 하는 사람들이 동물들에 대해서는 다른 태도를 보인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 년에 10억 마리나 먹는 치킨은 거의 전부가 암컷이다. 암평아리의 운명은 40일쯤 살다가 튀겨지든지 아니면 1년 동안 알을 낳다가 튀겨지든지 둘 중 하나다. 수컷은 어떨까? 대부분은 태어나자마자 산채로 분쇄기에 들어가서 비료가 되거나 암탉의 사료가 된다. 극히 일부의 수평아리는 초등학교 앞에서 판매되어 알을 낳는 암탉으로 성장하라는 실현 불가능한 소망의 대상으로 며칠 살다가 죽는다.
이젠 병아리감별사란 직업도 끝물이다. 병아리가 태어나기 전에 유정란 상태에서 암수를 구별하는 기술이 독일에서 개발되었기 때문이다. 수평아리는 아예 태어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깨어난 상태가 아니라 알 상태라는 차이가 있을 뿐 분쇄기에 들어가야 하는 수평아리의 운명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아예 암수를 정해서 낳을 수 있으면 어떨까?
“버드나무로 만든 도끼를 임산부 모르게 이불 밑에 두면 아들을 얻는다.” 조선 후기 민간요법을 수집해 놓은 ‘득효방’에 나오는 이야기다. 도끼를 임산부 몰래 이불 밑에 둘 도리가 없으니 실현 불가능한 방법이다. 하지만 동물의 암수가 염색체만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도마뱀, 거북, 악어는 부화될 때 온도에 따라 암수가 달라진다. 흰동가리는 암컷이 죽으면 수컷이 암컷으로 변하고 새끼 중 가장 큰 놈이 수컷이 된다. 사람의 경우 Y염색체를 가지고서 딸로 태어나는 아이들이 적지 않다.
지난 14일자 ‘사이언스’에는 아기의 성별을 결정하는 DNA 스위치가 발견됐다는 논문이 실렸다. 모든 인간은 그냥 내버려두면 여자가 된다. 그런데 Y염색체에 있는 SRY라는 유전자가 발현되면서 고환과 페니스 같은 남성 형질이 형성된다. SRY 유전자가 발현되려면 스위치가 작동해야 한다. SRY 유전자의 스위치가 생쥐에게서 발견되었다. 같은 역할을 하는 유전자 스위치가 사람과 닭에게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모든 병아리를 암평아리로 만들 수 있게 된다. 더 이상 불쌍한 수평아리를 보지 않아도 된다. 마찬가지로 DNA 스위치 하나를 눌러서 ‘여자만으로 이루어진 세상’을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다행히 남자만으로 이루어진 세상은 만들지 못한다.) 설마 이런 세상을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내게는 딸만 둘 있다. 딸딸이 아빠로서 ‘초등학교에 남자 교사가 적어서 문제’라는 따위의 말이 아주 불편하다. 구성원의 절대 다수가 남성인 대학교수 사회나 국회에 대해서는 별다른 문제점을 느끼지 못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남자를 잠재적인 범죄자 취급하면서 조롱과 적대의 대상으로만 삼는 일부 페미니스트에게도 불편함을 느끼기는 마찬가지다.
똘똘 뭉치는 게 운동이 아니다. 운동은 자기편을 늘려가는 과정이다. 남자들을 자신의 적으로 삼는 게 아니라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야 이긴다. 예멘 남성 난민들과도 연대해야 이긴다. 미안한 존재로 태어난 내 딸에게서 언젠가 태어날 딸에게 선사할 명랑하고 안전한 사회는 유전자 스위치로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다. 사랑이 이긴다.
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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