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 밤 11시 독일과 3차전
신태용 감독, 결전 앞둔 선수에
“고개 숙이지 말라” 우선적 주문
“그냥 마음껏 즐기라고 해주자”
네티즌도 비난보단 투혼 격려를
“부족한 부분은 월드컵 끝나도
꾸준한 관심으로 개선해 나가야”
한국이 치른 2018 러시아월드컵 조별예선 2경기 모두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관전했다는 직장인 김준현(29)씨는 “‘패배 속에서도 뭉클했던’ 이번 대회 순간들을 오래 기억하고 싶다”고 했다. 패배의 아쉬움은 크지만 매 경기를 마지막 경기처럼 뛴 선수들의 투혼과 그간 모르고 지냈던 K리거들의 눈부신 활약에 감동했다고 한다. 김씨는 25일 “비록 1승 1무로 16강 진출을 눈앞에 둔 숙명의 라이벌 일본과 달리 한국은 2패로 16강 탈락 위기에 처했다지만, 두 경기 연속 페널티 킥 실점이란 불운 속에서도 최선을 다해 뛴 모습은 일상에 지친 내게 큰 활력이 됐다”고 했다.
실제 수많은 시민들은 거리, 가정, 직장 등에서 한국 경기를 지켜보며 매 순간 열광하고 때론 탄식하며 저마다의 방법으로 월드컵을 즐겼다. 경기에서 졌다고 크게 분노하거나, 그릇된 방식으로 화풀이하지도 않았다. 이날 서울경찰청에 따르면 지난 18일 스웨덴과 조별예선 1차전 단체관람을 위해 서울 광화문광장과 영동대로 등에 모인 시민은 무려 4만2,000명. 24일 0시에 시작한 멕시코와 2차전에도 3만9,000여명이 거리 응원을 즐겼는데, 이 과정에서 기물파손이나 싸움, 성추행 같은 위법행위는 물론 문제가 될 만한 큰 다툼도 없었다고 한다. 2002년 한일월드컵 이후 패배에 분노하기보다 최선을 다해 싸운 선수들 모습에 주목한 의연한 자세, 그간 성장해 온 성숙한 시민문화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온라인상 분위기는 정반대다. 한국경기 관련 기사엔 특정 선수에 대한 인신공격성 댓글이 수도 없이 달렸고, 청와대 국민청원 홈페이지엔 일부 선수의 입국을 금지하라는 요구부터 선수의 가족까지 해외로 추방해 달라는 극단적인 글도 많았다. 익명성의 벽 뒤에 숨어 ‘사형’을 언급하는 등 상식에서 벗어난 주장들도 상당했다. 온 국민들에게 카타르시스가 전달돼야 할 월드컵에서 일부 선수의 부진을 놓고 어김없이 되풀이 된 마녀사냥에 선수단과 가족까지 고통 받고 있다.
김씨는 “‘결과’만 지운다면 독일 스웨덴 멕시코와 맞붙은 불리한 조 편성 속에서도 조현우(27ㆍ대구), 문선민(26ㆍ인천)의 발견, 박주호(31ㆍ울산), 기성용(29ㆍ스완지)의 부상 투혼, 손흥민(26ㆍ토트넘)의 집념의 만회골 등 감동의 순간들이 더 많았다”고 말했다.
실제 김씨 얘기처럼 이번 대회에선 2전 전패라는 결과에 가려진 교훈도 많았다. 두 경기 연속 선방 쇼를 보이며 일약 스타로 떠오른 골키퍼 조현우는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온다’는 격언을 현실화했다. K리그 무대에서 묵묵히 활약해왔음에도, 재정적 어려움을 겪는 시민구단 소속이라 미디어 주목도가 낮아 긴 무명생활을 겪었던 설움 또한 떨쳐냈다. 스웨덴 3부 리그 출신으로 극적인 발탁 과정 탓에 ‘신데렐라’로 불린 문선민도 ‘포기하지 않으면 불가능은 없다’는 교훈을 새삼 실감케 했다. 대표팀 발탁은 기대도 안 해 지난달 14일 월드컵 대표 명단 발표 당시 숙면을 취하다 지인들의 축하 전화에 잠에서 깼다는 그는, 내세울만한 학벌도 경력도 없지만 실력과 열정으로 자신에게 온 소중한 기회를 낚아채 당당히 월드컵 무대에 서며 팍팍한 사회를 헤쳐가고 있는 청년들에 용기를 불어넣었다.
지난 2경기에서 숱한 스토리를 남긴 한국 축구대표팀은 27일 오후 11시 러시아 카잔에서 독일과 마지막 결전을 벌인다. 스웨덴전에서 공을 살리기 위해 끝까지 쫓아가다 햄스트링이 파열된 박주호에 이어 멕시코전에선 상대 선수의 거친 플레이에 왼쪽 종아리를 다친 주장 기성용마저 결장한다. 앞선 2경기에서 혼신의 힘을 쏟은 선수들 몸도 지칠 대로 지쳤을 테다. 1승 1패로 16강행을 위해 사활을 걸어야 하는 독일과 맞대결이기에, 누구도 한국이 쉬운 승부를 펼칠 거란 예상은 않는다. 영국 도박사들은 한국의 2-0승리보다 0-7패배의 가능성을 더 높이 보는 판이다.
그럼에도 한국 대표팀은 죄인 된 심경으로 독일전을 준비하고 있다. 경기 자체도 부담일 텐데, 국내 비판 여론을 먼저 견뎌내야 하는 처지다. 신 감독은 현지에서 마지막 경기를 대비한 훈련에 앞서 ‘고개 숙이지 말라’는 주문부터 했다고 한다. 이날 임종석 청와대 비서실장은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독일전을 뛰는 선수들에게 그냥 마음껏 즐기라고 해주자”고 제안했다. 직장인 이송민(43)씨는 “누가 손흥민을 골을 넣고도 웃지 못하게 만드는가”라며 “월드컵의 주인공인 선수들이 웃는 낯으로 축구의 축제를 즐기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축구계 관계자들은 “4년 내내 무관심하다 월드컵에서의 부진에 선수들을 죄인 취급하기에 앞서, 끝까지 응원한 뒤 잘 한 부분은 격려해주고 부족한 부분은 철저히 파악해 뼈저리게 반성ㆍ보완 하도록 꾸준한 관심을 쏟는 자세가 더 필요한 시점”이라고 입을 모았다.
김형준 기자 mediabo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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