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30호실
부인 故 박영옥 여사 떠난 장소
현충원 아닌 가족묘원에 안장도
생전에 써 놓은 ‘묘비글’도 공개
“세월의 허망함을 한탄”하며
“그냥 웃기만 하던 자”라고 자평
향년 92세로 23일 타계한 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64년을 함께했던 부인 고(故) 박영옥 여사의 발자취마저 뒤따랐다. 김 전 총리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30호실은 3년 전 먼저 세상을 떠났던 아내, 박 여사의 빈소였다. 가족장으로 장례를 치르고 현충원이 아닌 충남 부여의 가족묘원으로 장지를 정한 이유도 사후(死後) 아내와 함께 하고자 하는 김 전 총리의 유지였다.
김 전 총리는 2014년 9월 박 여사가 척추협착증과 요도암으로 입원하자 본인이 거동이 불편한 상황에서도 매일 병상을 지켰다. 의료진이 박 여사의 임종이 가까워졌음을 알리자 김 전 총리는 주변 사람들에게 자리를 비켜달라고 말한 후 홀로 손을 꼭 잡은 채 임종을 지켰고, 1951년 선물했던 결혼 반지를 목걸이에 매달아 박 여사의 목에 걸어준 것으로 알려졌다. 가족들이 5일 내내 부인의 빈소를 지키던 김 전 총리의 건강을 우려해 휴식을 권하자, 그는 “평생 날 위해 살다간 아내가 누워 있는데 무슨 면목으로 편히 앉아 있느냐”며 자리를 지키기도 했다.
김 전 총리와 박 여사는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소개로 만났다. 박 여사는 전두환 신군부 시절 김 전 총리가 부정축재 혐의로 연행되자 직접 구명운동을 벌이는 등 평생 김 전 총리의 정치적ㆍ정신적 조력자 역할을 해왔다.
이런 김 전 총리는 3년 전 박 여사의 빈소에서 “난 마누라하고 같은 자리에 누워야겠다 싶어서 국립묘지 선택은 안 했다”며 “거기(장지에) 나하고 같이 나란히 눕게 될 거다”라고 말했고, 이번에 실천으로 옮겼다.
김 전 총리의 장례는 본인의 뜻에 따라 가족장으로 간소하게 치러지며 화장돼 충남 부여의 가족묘에 안장될 예정이다. 정진석 자유한국당 의원은 24일 기자들과 만나 “27일 오전 6시 30분 빈소에서 발인제를 간단하게 지내고 영결식을 할 것”이라며 장례 일정을 밝혔다. 정 의원은 “영결식은 신문영 운정재단 사무총장의 사회로, 김진동 이사장이 고인의 약력을 소개하고 이한동 장례위원장이 조사, 박형규 전 의원이 만사를 하고 손인웅 목사가 기도한 뒤, 성문 스님이 염불을 하는 순으로 진행된다”고 덧붙였다.
27일 오전 9시에는 김 전 총리의 자택이었던 청구동에서 노제를 지낸 뒤 오전 11시 서초동 서울추모공원에서 화장할 예정이다. 이후 김 전 총리 고향인 부여의 가족묘원으로 가는 길목에, 그가 다녔던 공주고등학교 교정을 들러 노제를 한 번 더 치를 예정이다. 부여 가족묘에는 오후 3시 30분쯤 도착, 4시부터 하관식이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한편 김 전 총리가 생전에 써놓은 묘비글도 공개됐다. 총 121자로 된 묘비글은 평생의 정치철학과 함께 박 여사를 향한 이러한 애틋한 마음이 담겨 있으며 묘비는 현재 가족묘원에 세워져 있다. 김 전 총리는 이 글에서 “‘생각이 바르므로 사악함이 없다(思無邪)’는 말을 인생의 도리로 삼고 한평생 어기지 않았다”며 “‘경제가 궁핍하면 한결같은 마음을 가질 수가 없다(無恒産而無恒心)’는 말을 치국의 근본으로 삼았다”고 적었다. 이어 “국리민복(國利民福)과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구현하기 위하여 헌신ㆍ진력하다 보니 만년에 이르렀다”고 술회했다.
김 전 총리는 “세월의 허망함을 한탄(年九十而知 八十九非)”하며 “쓸데없이 말 많은 물음에는 답하지 않고 그냥 웃기만 하던(笑而不答) 자”라고 자평했다. 그러면서 “내조의 덕을 베풀어준 영세반려와 함께 이곳에 누웠노라”고 덧붙였다. 박재현 기자 remak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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