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鐵馬(철마)는 달리고 싶다’. 지난 23일 강원 철원군 월정리. 빛바랜 양철간판 아래 기찻길은 뚝 끊겨 있었다.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서울에서 북한 원산까지 이어졌던 철로에 난 상처였다. 민간인 출입 통제 구역으로 남방한계선에 가장 근접해 있다는 금기의 땅엔 전쟁의 흔적이 가득했다. 분단된 한반도처럼 몸통이 뚝 잘린 4001호 열차와 붉게 녹이 슨 채로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수송 열차의 잔해가 남아있었다. 한국전쟁 2대 격전지였다는 피의 땅엔 푸른 들풀과 노란 들꽃이 우거져 있었다.
“존 레넌ㆍ오노 요코처럼 ‘평화에 기회를’ “
죽음의 역사가 깃든 새 생명의 땅에 평화의 노래가 울려 퍼졌다.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을 볼 수는 없었지만…” 실향민 부모를 둔 가수 강산에는 월정리 철도에서 통기타로 분단의 슬픔을 담은 노래 ‘라구요’를 불렀다. 그가 선 곳에서 휴전선까지는 2㎞ 남짓밖에 되지 않았다. 강산에는 북측에 노래가 전해지길 바라는 듯 하모니카를 입에 물고 ‘예럴랄라’로 열창을 이었다. 음악과 평화를 주제로 23~24일 철원 일대에서 열린 제1회 DMZ 피스프트레인 뮤직 페스티벌(피스트레인 페스티벌) 특별 무대에서다. 강산에는 공연 직후 한국일보와 만나 “이렇게 끊긴 철도를 보며”라며 감상에 젖은 듯 비틀스 출신 존 레넌(1940~1980)의 노래 ‘기브 피스 어 찬스’ 얘기를 꺼냈다.
“레넌이 (그의 아내이자 설치미술가인) 오노 요코와 1970년대 반전 퍼포먼스를 할 때 ‘평화에 기회를 주라’며 노래했잖아요. 이를 이어 받아 우리도 70여 년 만에 온 평화의 분위기를 이어갔으면 좋겠어요.”
월정리 철길에선 강산에와 인디 음악 듀오 방백, 영국 싱어송라이터 뉴턴 포크너가 무대를 이었다. 영국 펑크록의 전설인 섹스피스톨스 출신 글렌 매트록도 비무장지대를 찾아 이들의 무대를 지켜봤다. 그는 월정리에서 북쪽으로 솟은 높은 벽을 가리키며 “저 위에 올라 북한 사람들이 음악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고 싶다”며 “평화를 위한 변화를 요구하는 이 축제가 그래서 중요하다”고 말했다. 페스티벌 주최 측에 따르면 월정리 철로에서의 공연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동연 피스트레인 페스티벌 공동집행위원장은 “유엔의 허가를 받고 무대를 꾸렸다”고 밝혔다. 평화를 염원하는 특별 무대는 300여 명이 지켜봤다. 초등학생 두 자녀와 월정리를 찾은 진재완씨는 “아이들에게 분단이란 역사의 현장을 직접 보여주고 싶어 함께 왔다”고 말했다.
‘발해를 꿈꾸며’ 뮤비 촬영 장소의 비극
월정리 공연 직전엔 노동당사에서도 또 다른 특별 공연이 열렸다. 철골 없이 러시아식으로 지어진 노동당사는 한국 전쟁 후 앙상한 뼈대만 남은 비극의 공간이다. 1990년대를 풍미한 댄스그룹 서태지와 아이들의 노래 ‘발해를 꿈꾸며’ 뮤직비디오 촬영지로도 알려져 있다. 현대 무용가 차진엽이 이끄는 콜렉티브에이는 고통의 몸짓으로 노동당사에서 자행된 살육의 아픔을 토해냈고, 가수 선우정아는 김민기의 ‘새벽길’ 등을 불러 평화를 바랐다.
이 축제는 여정도 특별했다. 서울에서 백마고지역까지 ‘평화열차’가 운영됐다. 165분을 달린 열차는 콘서트장을 방불케 했다. 록밴드 갤럭시익스프레스는 ‘세계로 가는 기차’(들국화) 등을 연주했고, 서아프리카 부르키나파소에서 온 원주민 등으로 구성된 타악팀 쿨레 칸의 공연이 흥을 보탰다. 이 열차엔 박원순 서울시장을 비롯해 한국에 머무는 외국 예술인 등 140여 명이 탑승했다. 사전 신청으로 운 좋게 평화열차에 탄 직장인 이은천씨는 “책에서만 본 DMZ 인근에서 특별한 공연이 열린다고 해 참여하게 됐다”며 웃었다. 이씨는 24일 매트록과 크라잉넛의 협연을 보기 위해 페스티벌 본 무대인 고석정 인근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고석정에서 이틀 동안 이어진 가수 이승환과 밴드 장기하와 얼굴들, 새소년 그리고 DJ 히치하이커와 이상순 등의 공연엔 1만 2,000여 관객이 몰렸다.
철원=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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