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자당 나와 자민련 창당할 때
선친이 배지까지 버리고 합류
나는 JP의 지역구 물려받아
DJP연대 반대하는 인사들에
“박정희가 DJ에게 진 빚 내가 대신 갚겠다” 설득시켜
김종필 전 국무총리께서 지난 23일 노환으로 별세하셨습니다. 저는 김 총리께서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10년 가까이 투병을 해오시는 동안 한두 달에 한 번씩 모시고 저녁을 함께 했습니다.
오른쪽 반신이 마비됐지만, 총리께서는 “이제 오른 손에 힘이 안 들어가니, 골프 샷은 더 잘 나오겠다”며 유머를 잃지 않았습니다. 그 분 뜻대로 골프장에 모시고 나간 적이 있지만, 마음 같지 않았습니다. 총리님 휠체어를 몰고, 좋은 풍광 구경시켜 드리고 돌아 온 것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왼손으로 포크를 이용해 식사를 했지만, 점점 어려워져서 나중에는 옆에서 수발을 들어야 했습니다. 3년 전 부인 박영옥 여사께서 돌아가신 후로는 몸과 마음이 눈에 띄게 쇠락해지셨습니다. 두 분의 사랑은 평생 오롯했습니다. 박 여사의 성품이 호랑이 같아서 김 총리가 평생 한눈을 팔지 않았다고 해설하는 분들이 있지만, 그 분은 제게 이렇게 얘기해 주셨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전란통에 조카를 내게 소개시켜 줬잖아. 피난지 대구에서 말라리아에 걸려 몸져 누운 집사람에게 내가 의사를 구해줬어. 박 대통령은 ‘데려가라’고 하시는데 서로 연락이 끊겼어. 그런데 집사람이 처녀 몸으로 전갈도 없이 최전선에 있던 나를 찾아왔잖아. 목숨 걸고 찾아온 여인의 순정을 어떻게 저버리겠어.”
보름 전 아산병원에 문병 갔을 때 평소와 달리 눈을 뜨지 못하고 말씀을 하지 못하셨습니다. 저는 누워계신 총리님의 손을 꼭 잡아드렸습니다. 그게 저와 총리님의 마지막 순간이었습니다.
총리님은 저의 정치적 스승입니다. 저는 2000년 총선에 당선돼 자유민주연합(자민련) 대변인으로 김종필 총재를 모시면서 정치에 입문했습니다. 총리님은 제 정치의 출발점입니다. 저는 그 분에게서 정치를 배웠습니다. 그 분의 지역구였던 충남 부여까지 제가 이어 받았으니, 정치적 후계자가 된 셈입니다. 보통 인연은 아닙니다.
사적인 인연으로 친다면, 저는 그 분을 ‘아버님’으로 불러야 할 사이입니다. 저의 선친(정석모 전 내무부 장관)은 김 총리와 공주고등학교 졸업 동기입니다. 아버님은 김 총리와 함께 오래 공직생활을 한 지기였습니다.
총리님은 1995년 민주자유당(민자당)을 탈당해 자민련을 창당했습니다. 민자당의 민주계가 자신을 쿠데타 세력으로 몰며 핍박하자 탈당한 것입니다. 그때 민자당 전국구 의원이었던 아버님이 유일하게 국회의원 배지를 버리고 김 총리 진영에 합류했습니다. 총리님은 그 일을 두고두고 고마워 하셨습니다.
제가 몸이 불편해진 아버님의 뒤를 이어, 2000년 자민련 공천으로 공주에 출마한 데는 그런 인연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총리님은 우리나라의 산업화와 민주화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유일한 분입니다.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산업화 근대화의 초석을 놓았고, DJP(김대중-김종필) 연대로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루는 단초를 열었습니다.
중앙정보부를 창설한 그가 중정에 의해 동경에서 납치되고, 박정희 정권과 대척점에서 투쟁한 김대중 전 대통령과 손을 잡은 것은, 그 분의 탁월한 역사인식과 용기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당시 총리님은 ‘김대중과 어떻게 손을 잡을 수 있느냐’는 반발에 “박 대통령이 김대중씨에게 진 빚을 내가 갚겠다”고 설득하셨습니다.
총리님은 팔방미인이었습니다. 아코디언과 피아노를 능숙하게 다뤘고, 농악대를 이끌면서 꽹과리를 신나게 치던 분이었습니다. 운동을 좋아했고, 수채화를 즐겨 그렸습니다. 문화예술계 인사들과 교유하며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어떤 이는 그 분을 ‘르네상스적 인간’이라고 했습니다.
충청도 특유의 느긋함이 몸에 배어있는 전형적인 충청도 양반이셨습니다. 남에게 하는 가장 험한 말이 “그 사람 참 심하구만”이었습니다. 그는 향기 나는 정치인이었습니다. 여유와 여백의 아름다움을 알고, 유머와 해학을 즐겼습니다.
자민련 대변인 시절부터 출입한 그의 침실과 거실에는 책이 여기저기 무더기로 쌓여 있었습니다. 그는 평생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의 여유와 인문학적 소양은 축적된 독서에서 나왔습니다.
살얼음판같은 요즈음 정치판에서, 상대의 터럭같은 흠집을 잡고 죽이려 드는 살벌한 정치문화에서 그의 여유와 여백이 더욱 그리워집니다.
구름 속의 뜰, 운정. 그는 불꽃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나라의 운명을 개척한 혁명아 풍운아였습니다. 그의 마지막 눈 앞을 스쳐간 광경은 이게 아니었을까요? ‘한국전쟁과 영옥’, ‘박정희와 혁명군’, ‘조국 근대화와 민주화’, ‘고향 부여’….
정진석 자유한국당 의원(충남 공주ㆍ부여ㆍ청양ㆍ4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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