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력을 더 하란 말이야. 쉬운 일만 하려고 하잖아. 우린 더 힘들었어.”
마디마디 아픈 말이다. 전쟁은 벌어질 수 있고, 경우에 따라 감내해야 할 것으로 묘사한다. “낳아 놓으면 다 먹고 살아. 어른들이 왜 10명씩 낳았겠어”라는 말 앞에선 겨우겨우 아이 하나 길러내는 필부들의 무릎이 꺾인다. 한국일보가 창간 64주년을 맞아 8회 시리즈로 연재하고 있는 기획물 ‘성난 노인들의 사회’ 속에서 만난 노인들은 젊은이들에 매우 화가 나 있었다. 태극기 집회 현장, 탑골공원 그늘 아래, 복지관의 쉼터에서 그들은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서, 이기적인 생각에 아이를 낳지도 결혼을 하지도 않는 자식 세대를 향해 거듭 성을 냈다. 간혹 공공장소에서 무질서와 폭력으로 발현되는 이들의 분노를 젊은이들은 쓸데없는 권위의식과 아집이라 무시하고, 귀를 틀어막고 있다. 대답 없는 젊은이들 앞에서 노인들은 더욱 목청을 높인다. 우리 사회가 절대 가볍게 넘길 수 없는 가장 아픈 오늘의 상징이다.
그럴듯한 성장의 과실을 수확하고, 민주ㆍ복지사회를 영위하고 있음에도 우리는 어째서 분노한 노인들을 자주 목격할 수밖에 없는가. 노인들의 분노는 두 가지 갈래로 나눠 설명할 수 있다.
첫째는 평생 의지해온 이념과 세계관이 송두리째 주저앉는 상황에 대한 서운함이다. 전쟁의 참상을 겪은 이들은 생존을 최우선에 두고 인권과 복지를 뒤로 미뤄둔 성장 우선주의 사회를 평생 살아왔다. 하지만 젊은 세대의 현대 사회는 성장에 집착하지 않는다. 재벌가 갑질에 대한 젊은이들의 지적에 “물컵을 던진 것만 문제 삼으면 되지(8일자 2면)”라고 말하며 노동자의 인권을 운운하는 게 부적절하다는 퉁명스러운 반응을 보이는 이유다. 30여 년 전까지 한국사회를 지탱한 절대가치였던 반공주의가 냉전 종식에 이어 남북화해로 존재 이유를 잃어간 데 대해 ‘공산주의와 좌파를 동일시하는 오류(8일자 2면)’로 맞서는 태도도 노인들의 분노를 비추는 선명한 장면이다.
노인 분노를 설명하는 또 다른 지점은 잊힘에 대한 설움일 것이다. 세상은 더 이상 노인들의 지혜와 경험을 비싼 값을 주고 구하지 않는다. 노인들이 청ㆍ장년기를 보내는 동안 우리 사회는 고속성장을 했고, 경제가 자라는 속도만큼 빠르게 지식은 분화됐다. 스마트폰과 클릭할 인터넷 사이트 링크만 있다면, 하루가 다르게 업데이트되는 지식과 정보를 누구라도 손쉽게 끌어 모으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무료라도 상담역할을 해주겠다는데 싫다고 한다(22일자 2면)”는 한 할머니의 말은 값어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사회로부터 잊혀지는 데 대한 한탄이다. “지름길을 찾으려면 늙은 말의 뒤를 따라야 한다”라며 노인의 지혜를 높이 산 한비자의 ‘노마지지(老馬之智)’의 메시지는 오래 전에 용도 폐기된 셈이다. “우리가 못 알아들으면 대답을 안 하는 거, 그게 참 무시하는 거다(22일자 2면)”라는 할머니의 성난 목소리는 노인을 당당한 구성원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 대한 날것의 저항이다.
‘성난 노인들의 사회’가 지닌 함의는 분을 삭이지 못하고 젊은이들을 향해 성내는 노인들을 지탄하는 게 아니다. 노인들의 분노가 최종적으로 상징하는 극단적인 세대 갈등의 해답을 시급히 찾자는 의도이다. 성난 노인들의 사회를 만든 공범은 시대와 시스템일 뿐 노인도 청년도 아니다.
광장과 지하철에서 매 순간 벌어지는 세대 간 충돌은 위험수위를 넘어섰다. 1968년 출생인구는 93만5,000여명에 달하는 반면, 2008년 출생인구는 이들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46만6,000여명이다. 70세 노인과 30세 청년으로 이들이 맞이할 20년 뒤, 노인 세대는 청년 세대를 지금과 비교할 수 없는 규모로 압도할지 모른다. 한국 사회가 세대 갈등으로 만신창이가 되는 악몽 같은 미래를 막을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양홍주 기획취재부장 yangho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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