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외자를 낳은 한 여성이 아이를 모스크(이슬람 사원)에 남겨둔 채 길을 나선다. 중산층 가정 출신인 남자 주인공은 이웃에 사는 유부녀와 사랑에 빠진다.’
‘막장 드라마’의 흔한 설정으로 보이지만 드라마의 배경이 중동의 보수적 이슬람국가 사우디아라비아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지난달 17일에 시작한 라마단(이슬람 금식성월) 기간 중 사우디에서 방영되기 시작한 TV드라마 한 편이 논란을 촉발하고 있다. 문제작은 아랍 최대 민영 TV네트워크인 MBC의 드라마인 ‘알 아수프(Al-Asouf)’다.
이 드라마의 배경은 1970~1975년 전형적인 사우디의 지역사회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사우디의 사회 분위기는 비교적 자유스러웠으나 1979년 이란이 이슬람 혁명으로 보수적인 신정일치 통치로 급변하자 엄격한 종교 율법을 적용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이 드라마 속 여성은 몸과 얼굴을 가리지 않고 있으며 공공장소에서 남성과 여성이 자연스럽게 한 공간에 어울리는 모습도 등장한다.
이에 보수적 성직자를 중심으로 “드라마가 당시 시대상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지 못할뿐더러 부도덕한 행동을 부추기고 있다”며 비난을 펴고 있다. 저명한 종교지도자 압둘바셋 카리는 유튜브 영상을 통해 “드라마에서 불륜과 혼외자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모습은 재앙”이라고 말했다. 라마단 기간 중에는 TV 시청률이 치솟기 때문에 과거에도 TV 프로그램이 종종 논란이 된 적이 있지만 이번 ‘알 아수프’와 관련해서는 사우디아라비아의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주도하는 개혁ㆍ개방 정책과 맞물려 논란이 확산되는 분위기다. 무함마드 왕세자는 이미 여성 운전을 허용하고 35년 만에 상업 영화관을 여는 등 강력한 서구화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사우디 여성의 인권 문제를 다루는 인터넷 포털 ‘위민2030’에 따르면 알 아수프는 폭풍우를 뜻하는 말로, 이 드라마에서는 변화의 바람을 상징한다. ‘위민2030’은 “1970년대 급격한 사회 변화와 현재 진행 중인 사우디의 온건화 바람을 함께 의미하는 중의적 표현”이라고 전했다. 드라마 제작진은 무함마드 왕세자가 지난해 ‘1979년 이전의 온건한 이슬람’을 언급하기 전인 2016년에 촬영된 작품이기 때문에 무함마드 왕세자와는 관련이 없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관련 업계에서는 이를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 분위기다. 영화감독 압둘모센 무타이리는 영 일간 파이낸셜타임스(FT)에 “왕가에서 MBC에 이 작품을 만들자고 직접 제안하지는 않았겠지만 모종의 물밑 협상이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소연 기자 jollylif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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