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일 이뤄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일 북한 국무위원장의 역사적인 북미정상회담 성사의 막후에 미국인 투자가가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미 일간 뉴욕타임스(NYT)는 17일(현지시간) 이번 회담에 관여했던 복수의 전현직 관리를 인용해 싱가포르에 사는 미국인 투자가 가브리엘 슐츠가 막후 주인공이라고 보도했다. 이 신문에 따르면 북한의 한 최고급 관리가 지난해 여름 대북 사업 경험이 있는 슐츠에게 정상회담을 추진할 비밀채널(secret channel)을 만들고 싶다는 의사를 타진했다. 이에 슐츠는 트럼프 대통령 사위인 재러드 쿠슈너 백악관 선임보좌관과 만나 북한 측의 대화의향을 전달했다. 김씨 왕조가 지배해왔던 북한 지도층으로서는 대통령 가족인 쿠슈너는 창구로 안성맞춤이라고 판단했을 수 있다고 NYT는 분석했다.
슐츠는 수년 전 아시아에 투자를 하려는 트럼프가(家) 인물들과 접촉했던 인물로, 이 때 쿠슈너와 안면을 튼 것으로 보인다. 슐츠를 통해 북한 측 의사를 확인한 쿠슈너는 자신이 직접 역할을 하는 대신 중앙정보국(CIA)과 접촉을 했다. 쿠슈너가 공식 외교라인인 국무부가 아닌 중앙정보국을 선택한 까닭은 당시 렉스 틸러슨 국무부 장관과 쿠슈너 사이가 썩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고 NYT는 분석했다. 실제로 쿠슈너가 CIA에 접촉했을 당시 CIA 국장이었던 마이크 폼페이오는 북미 정상회담 전 두 차례나 평양을 방문하는 등 회담 성사의 막후 주역으로 활약했다. 뉴욕 채널 등 외교라인을 통한 통상적인 북미접촉과 달리 이번 정상회담이 폼페이오와 김영철 북한 노동당부위원장 간 북미 정보라인을 통해 성사된 궁금증이 풀린 셈이다. 소식통들은 트럼프-김정은을 중재하기 위한 문재인 대통령의 헌신적인 노력이 이번 회담 성사에 큰 역할을 하기는 했으나 북미 접촉 초반기 슐츠의 접촉이 회담 성사의 발판을 마련하는 데 유용했다고 평했다.
슐츠의 정체는 광산 거부의 후손이라는 것 정도밖에 알려진 것이 없다. 그러나 그가 운영하는 투자사 SGI 프런티어 캐피탈은 위험부담이 높지만 성공하면 고수익을 올릴 수 있는 에티오피아, 몽골 등 ‘프런티어 마켓’에 집중투자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2013년 영 일간 파이낸셜 타임스와 인터뷰에서 “기회는 우리가 안전지대의 가장자리에서 발견될 수 있다고 믿는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 위원장을 향해 비핵화가 이뤄진다면 북한을 남한처럼 잘 살 수 있게 해준다고 공언하면서, 미국의 민간 투자가 이뤄질 것을 암시했는데, 북미 정상회담 중재라는 높은 위험부담을 감수한 슐츠의 행보 역시 주목된다.
이왕구 기자 fab4@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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