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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52시간과 13분

입력
2018.06.14 20:0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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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2018-06-14(한국일보)
게티이미지뱅크/2018-06-14(한국일보)

‘오늘은 크리스마스다. 내가 기쁜 건 크리스마스가 아니라 아빠가 쉬는 날이라는 사실이다. 마법처럼 아빠의 쉬는 날이 찾아왔다.’ 10세 아들의 일기를 한참 뒤에 읽었다. 모두 잠든 불 꺼진 집, 휴대폰 불빛에 기대. 자책에 앞서 소름이 돋았다.

가끔 삶에 신호등이 깜빡인다. ‘잠깐 멈추라’고. 6년 전 아버지 임종도 그랬다. 평생 노동에 찌든 당신은 삼형제를 차례로 어색하게 껴안은 뒤 “많이 보듬지 못해 미안하다”고 “서로 아끼면서 재미나게 살라”고 했다. 그리고 잠들었다. 감은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후 나는 출퇴근 때마다 아이를 안아준다.

일과 가정의 균형을 나름 흉내는 내노라 자부했던 내게 아이의 일기는 벅찬 빨간불이었다. 포옹과 달리 마법(휴일)은 내 노력만으로 되는 게 아니니까. 눈치도 봐야 하고, 일의 특성상 상황도 살펴야 한다. 더구나 사건 사고 전담 사회부 아닌가! 그래도 차근차근 휴일을 챙긴 덕에 1년 새 주 5일 근무는 거의 안착됐다. 입에 달고 산 말이 있다. “부장도 좀 쉬세요!”

올 들어 5학년 아들놈이 수학을 ‘매일’ 가르쳐달라고 청한다. 그러고 싶다. 이른 귀가래야 밤 9시30분, 품에 안기는 숨이 따스해도 매일 누릴 수 없는 처지, 아이가 잠을 청할 즈음 집에 닿으면 깊게 잠들 때까지 골목을 서성이는 주제에 언감생심이다. 평일은 그렇게 취약하다. 아이들이 가족과 대화하거나 노는 시간이 평일 기준 하루 1,440분 중 13분이라는 조사 결과도 있지 않은가.

돌파구는 보름 뒤 시행되는, 탈 난다고 말도 많은 주 52시간 근무다. 바쁘기로 소문난 우리 부 근무체계를 손보는 일에 한발 얹은 게 나는 기쁘게 번거롭다. ‘회식은 어떻고, 업무상 식사는 어떻고’ 와글와글 우리의 거룩한 노동이 낱낱이 공론의 장에 올라 감격스럽다.

혼란은 새 시대의 기회로 기꺼이 감수하면 좋겠다. 문제는 다 드러내야 풀 수 있는 법이다. 오랜 관행의 더께와 의식 밑바닥의 그릇된 앙금은 시나브로 벗겨지게 될 것이다.

버스기사들의 연쇄 이동과 늘어질 배차 간격을 걱정할 게 아니라 그간 홀대했던 그들의 노고에 감사하자. 밤샘노동 금지로 게임 출시가 늦어질 거라는 우려는 누군가의 과로사를 막았다는 긍지로 바꾸자. 저녁밥도 못 먹는 삶이 될 거라는 불평 대신, 기본급이 낮아 초과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시스템을 고쳐나가자. 주 5일 근무 탓에, 카드 수수료 탓에, 글로벌 금융위기 탓에, 부정청탁금지법 탓에 힘들었던 영세업자 문제는 이번에 주 52시간이라는 이유를 하나 더 갖다 붙이지 말고 제발 근본 해법을 모색하자.

주 52시간 시대는 어떤 모습일까 상상하다 문득, 2월 1일자 36.5°(기계한테 절하는 한솔 노예

)에서 다뤘던 한솔페이퍼텍㈜ 사정이 궁금했다. 최저임금 위반, 상습 초과노동에 시달리다 파업한 노동자들은 칼럼 게재 보름 뒤 업무에 복귀했다. 후속 칼럼을 써달라는 일각의 요구도 떠올라 이 참에 겸사겸사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정이 좀 나아졌나요?”

“최저임금 적용되고 근무시간도 법 기준에 맞춰가면서 신규 채용도 하고 있어요. 나이 많은 사람들은 노동시간 단축으로 월급이 깎였다고 불만이죠. 젊은 사람들은 일하는 시간 줄고 월급은 올라서 좋아해요.”

“반가운 부분도 있고 아쉬운 면도 있네요.”

“아, 예전에는 사람 구하기 정말 힘들었어요. 그런데 파업 끝나고 신입사원 모집에 300명이나 지원했어요. 300명! 다 깜짝 놀랐죠.” 더 묻지 않았다.

300이란 숫자에서 나는 희망을 본다. 아직은 각자 욕심에 찌들어, 당장의 손해가 겁나, 주저하거나 반대편에 서겠지만, 어느 영화의 유명한 대사처럼 ‘언제나 그랬듯, 우린 해답을 찾아낼 것이다.’

참, 내 아들이 수학 박사가 되길 바라진 않는다. 마지막 눈을 감기 전 “미안하다”는 유언을 남기고 싶지 않을 뿐.

고찬유 사회부 차장 jutda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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