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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랑 산다] ‘파괴자’로 변하는 귀여운 토끼

입력
2018.06.17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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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 랄라가 좋아하는 만화책이다. 한번 입에 물면 쉽게 놓지 않는다. 이순지 기자
토끼 랄라가 좋아하는 만화책이다. 한번 입에 물면 쉽게 놓지 않는다. 이순지 기자

우리 집에는 토끼 랄라가 만든 예술 작품이 있다. 작품명은 ‘갉갉’. 이빨로 벽지를 뜯어 만들어 낸 작품인데, 기하학적인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절로 웃음이 번진다.

랄라의 작품 활동은 어린 시절부터 시작됐다. 데려온 지 한 달쯤 됐을 때 랄라는 하얀 앞니를 드러냈다. 벽지 끝을 살살 이빨로 물더니 그 다음에는 ‘쭉’하고 소리가 날 정도로 벽지를 세게 뜯었다. 처음에는 이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랄라를 향해 “이놈”이라고 소리 친 적도 있었다. 그러나 혼낼 때만 잠시 멈췄다가 랄라의 벽지 뜯기는 곧 다시 시작됐다.

토끼에게 남아 있는 야생의 습성 중에 하나가 ‘갉는 행동’이다. 갉기에는 호기심, 행복, 불만 등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겼다. 랄라에게 벽지 뜯기는 일종의 놀이와 같다. 호기심을 충족시켜주면서 지루함도 없애준다. 벽지 뜯기만 좋아하면 괜찮을 텐데 불행히도 랄라의 갉기 놀이는 집 안 곳곳에서 이어졌다. 랄라가 큰 앞니로 파괴한 물건은 스마트폰 충전기, 노트북 충전선, 각종 책 모서리, 옷, 가방 등 셀 수 없이 많다.

그 중에서도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머리카락이었다. 자고 있는 사이 랄라는 슬쩍 다가와 내 머리카락을 잘근잘근 씹어버렸다. 랄라 ‘미용사’는 예술성까지 가미해 내 머리카락을 지그재그로 만들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머리카락은 재미가 없었는지 한번 맛본 후로는 다시는 씹지 않았다. 보기에는 귀여워 보이지만 호기심 많은 토끼와 사는 일은 결코 만만치 않다.

호기심 많은 장난꾸러기 토끼와 살기
랄라가 만든 예술 작품이다. 작품명은 ‘비 내리는 벽지’이다. 이순지 기자
랄라가 만든 예술 작품이다. 작품명은 ‘비 내리는 벽지’이다. 이순지 기자

토끼에게는 물건을 갉는 것 외에도 야생의 습성들이 몇 가지 남아있다. 땅을 파는 행동, 오줌을 뿌리는 행동, 턱으로 무언가를 문지르는 행동 등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당황스러운 것은 무언가를 갉는 행동이다. 호기심을 느끼는 것은 모두 갉아버리는데 이 때문에 토끼 키우기를 포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많은 토끼 반려인들이 골치 아파 하는 건 토끼가 각종 전선을 갉아먹는 일이다. 토끼에게 전선은 재미있는 장난감이다. 씹는 맛이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전선을 잘못 물어 감전이 되거나 화재가 발생하는 최악의 상황이다. 실제 한 반려인이 인스타그램에 소개한 일화에 따르면 주인이 외출하면서 전선을 뽑지 않은 채 헤어 기기를 바닥에 방치했고, 호기심을 느낀 토끼가 전선을 물어 감전된 일이 있었다.

반려동물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미국 펫엠디(PetMD)는 이런 상황을 ‘토끼 비상 사태’로 규정하고 있다. 토끼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입에 넣는 습성을 갖고 있다고 한다. 전류가 흐르는 전선을 물면 토끼는 입안 화상, 심장 손상 등 여러 고통을 겪을 수 있다. 상태가 심각하면 사망에 이를 수도 있기 때문에 빨리 동물병원을 찾아야 한다.

전선 다음으로 토끼가 가정에서 많이 무는 것은 벽지와 가구다. 랄라는 특히 벽지를 좋아한다. 토끼는 벽지를 뜯을 때 나는 소리와 벽지가 벗겨지는 것을 재미있어 한다. 가구는 나무 냄새가 나고 씹는 맛이 좋아 선호한다고 한다. 전선을 무는 것 만큼 위험하진 않지만 벽지와 가구를 갉는 것도 건강에 좋진 않다. 펫엠디에 따르면 토끼의 호기심을 영양가 있는 건초와 씹을 수 있는 장난감으로 충족시켜주는 게 중요하다고 한다.

토끼의 사춘기, 파괴자의 탄생
원래 인형에는 노란색 뿔이 있었다. 랄라가 잘근잘근 씹어먹었다. 이순지 기자
원래 인형에는 노란색 뿔이 있었다. 랄라가 잘근잘근 씹어먹었다. 이순지 기자

랄라는 이제 사람 나이로 45살 정도가 됐다. 이미 호기심을 많이 충족해서 그런지 갉는 행동이 어릴 때보다 많이 줄었다. 토끼의 ‘갉기’ 때문에 고민하는 초보 반려인이 있다면 생후 3~5개월부터 찾아오는 사춘기만 일단 잘 넘기라고 말해주고 싶다. 이 시기는 토끼의 장난기와 반항이 폭발한다. 갉기는 심해지고 여기저기 소변이나 대변을 뿌리기도 한다.

특히 밤에는 토끼 집의 철사를 자주 갉아 잠을 포기해야 하는 일도 생긴다. 국내 토끼 기본서 ‘토끼’에 따르면 이 행동은 이른바 ‘꺼내 줘! 공격’이라고 불린다. 토끼는 철사를 갉으면 주인이 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때 반려인은 토끼가 갉는 행동을 멈출 때까지 쳐다보지 말고 무시해야 한다. 그 뒤에는 자주 갉는 토끼집의 철사 쪽에 토끼의 주식인 티모시 건초로 만든 판을 대는 것이 좋다고 한다.

랄라는 사춘기 시절 정말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다. 처음에는 토끼집의 철사에 티모시 건초 패드를 대줬지만, 결국 문을 열어줘야만 했다. 랄라가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자신의 배쪽 털을 입으로 전부 뜯어버렸기 때문이다. 랄라처럼 스트레스가 심한 경우에는 다른 방법을 찾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토끼 기본서 ‘토끼’는 철사로 만든 집에서 꺼내주더라도 울타리를 넓게 설치해 정해진 범위 내에서만 놀게 하는 방법을 추천했다.

모른 척하고 빠르게 도망가는 랄라. 거실 쪽 벽지가 남아나지 않았다. 이순지 기자
모른 척하고 빠르게 도망가는 랄라. 거실 쪽 벽지가 남아나지 않았다. 이순지 기자

많은 것을 파괴하는 사춘기에는 토끼에 대한 각별한 관심이 필요하다. 그리고 토끼로 인해 물건이 손상되는 것을 조금이라도 피하고 싶다면 반려인이 미리 대처해야 한다. 나무로 된 가구, 벽지 등에는 플라스틱 커버를 붙이고 전선에는 커버를 씌워야 한다. 그리고 토끼가 씹을 수 있는 모든 것들은 토끼의 손길이 닿지 않는 높은 곳에 두는 것이 좋다. 다만 토끼의 오줌 피해에는 부지런히 빨래를 하는 수 밖에 없다.

‘파괴자’ 토끼와 잘 지내기
랄라가 풀을 먹고 있다. “왜 벽지를 뜯냐”고 물으면 아무 대답이 없다. 이순지 기자
랄라가 풀을 먹고 있다. “왜 벽지를 뜯냐”고 물으면 아무 대답이 없다. 이순지 기자

많은 반려인들은 우스갯소리로 토끼를 ‘파괴자’라고 부른다. 랄라와 살아보니 그 말에 나도 격하게 공감한다. 랄라가 파괴한 물건들은 셀 수 없이 많다. 어떻게 하면 이 파괴자와 잘 지낼 수 있을 까 고민도 했었다. 결국 호기심 많은 토끼의 관심을 다른 곳에 돌리고, 스트레스를 줄여주는 수밖에 없다.

토끼 습관 교정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미국 사이트 ‘버니 프루프(Bunny Proof)’에 올라온 글들을 보면 씹는 장난감을 주는 것이 좋다. 건초로 만들어진 매트, 나무로 만들어진 다리, 버드나무 공 등이 대표적이다. 이 장난감을 주면 토끼 건강을 챙기면서도 호기심을 충족시킬 수 있다고 한다.

반려인이 해야 할 일도 있다. 바로 ‘훈육’이다. 토끼를 훈육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 꼭 필요하다. 버니 프루프에 소개된 훈육 방법은 분무기를 활용하는 것이다. 분무기에 찬 물을 넣고 토끼가 무언가를 갉을 때 토끼 얼굴을 향해 가볍게 뿌린다. 갉는 행동을 할 때마다 반복적으로 하면 된다.

토끼를 위해 만들어진 장난감들이다. 버니 프루프 사이트 캡처
토끼를 위해 만들어진 장난감들이다. 버니 프루프 사이트 캡처

미국, 영국 등 토끼를 많이 키우는 나라에서는 토끼 행동 교정에 대한 사이트가 따로 있을 정도로 토끼 행동에 관심이 많다. 귀여운 외모와 달리 토끼는 키우기 만만한 동물이 아니다. 반려인은 토끼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갖추고 꾸준히 훈육과 훈련을 반복해야 한다. 그래야 토끼와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다.

랄라를 키우면서 버린 물건들은 셀 수 없이 많다. 가끔 나도 랄라가 끊어버린 스마트폰 충전선 때문에 화가 나서 소리를 버럭 지를 때가 있다. 그래도 반려인이 이해하고 인내해야 한다. 입양과 동시에 이 반려동물을 평생 책임지겠다는 암묵적인 약속을 했기 때문이다.

이순지 기자 seria1127@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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