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리처드 3세를 악의 화신이라고 생각하는데, 저는 그보다 광대 같은 모습을 나타내려고 노력했어요. 사악한 광대의 면모에 관객들이 유혹 당하면서, 어떻게 보면 그와 공범이 되기도 하는 거죠.”
혁신적인 작품으로 유럽 연극계 거장 중 한 명으로 꼽히는 토마스 오스터마이어(50) 샤우뷔네 베를린 예술감독이 연극 ‘리처드 3세’로 국내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14일 서울 역삼동 LG아트센터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오스터마이어는 “리처드 3세를 관객들 내면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게 하는 인물로 그리고 싶다”며 “관객들 스스로 자신의 내면에서 리처드 3세 같은 사악함을 찾아보는 독특한 경험을 마주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리처드 3세’ 연출을 결심한 이유도 “선과 악의 경계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작품을 연출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리처드 3세’는 영국 요크 왕조의 마지막 왕이었던 리처드 3세(1452~1485)를 다룬 셰익스피어의 초기 희곡이다. 기형적인 신체로 태어난 리처드가 형제와 조카들을 무자비하게 제거하며 왕좌에 오르는 이야기로, 리처드 3세는 배우들이 탐내는 배역으로 꼽힌다. 오스터마이어는 고전을 늘 새롭게 선보여왔다. 2005년 내한 공연한 ‘인형의 집-노라’는 주인공 노라가 남편을 총으로 살해하는 파격적인 결말로 끝맺었다. 2016년 ‘민중의 적’에서는 ‘다수는 항상 옳은가?’라는 문제를 제기하며 공연장을 토론의 장으로 변신시켰다.
리처드 3세의 광대 면모를 오스터마이어는 ‘리처드 3세’가 처음 공연된 영국 극장의 형태에서도 찾았다. “극장은 원형형태로, 관객들이 무대를 둘러싸 무대의 일부가 됩니다. 배우가 무대 위에서 읊조리는 독백도 관객의 반응을 즉각적으로 유도하는 의사소통이에요.” 오스터마이어가 연출하는 무대도 반원형태로 관객들이 무대와 가깝게 느끼게 된다.
오스터마이어는 주연배우인 라르스 아이딩어(42)에게 굳은 신뢰를 보냈다. 샤우뷔네 베를린 단원인 아이딩어와 ‘햄릿’을 함께 한 뒤 오스터마이어는 그에게 ‘리처드 3세’를 맡기기로 결심했다. 영어 운문으로 쓰인 희곡을 독일어 산문으로 바꾸었고, 한국 관객들은 이를 자막을 통해 또 한 번 번역된 언어로 접하게 된다. 오스터마이어는 “한 작품을 다른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관객에게 큰 장벽을 야기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아이딩어는 다른 언어로도 관객과 소통하고 관객을 유혹할 수 있는 훌륭한 배우”라고 강조했다.
독일 실험극의 산실인 샤우뷔네 베를린은 오스터마이어가 1999년 예술감독을 맡은 후 침체를 벗어났다. 주요 관객 연령대도 50~70대에서 20~30대로 확 낮아졌다. 오스터마이어는 “우리가 살고 있는 디지털 미디어 사회에서 극장은 유일하게 스스로를 돌아보고 주위를 반추할 수 있는 공간”이라며 “한국에서도 젊은 관객들이 많다고 느꼈는데, 이는 즐거운 현상”이라고 덧붙였다. ‘리처드 3세’는 14~17일 LG아트센터에서 공연된다.
양진하 기자 realh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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