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년 만에 경기도지사 탈환에 성공한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당선인 5남2녀 7남매 가운데 다섯째로 경북 안동 태생이다.
본래 5남4녀였지만, 누이 둘이 일찍 세상을 떴다. 열 살에 아버지가 돌연 집을 떠난 뒤 어머니와 일곱 남매가 화전을 일구며 생계를 꾸렸다.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터무니없이 가난했다.
◇ 상처로 얼룩진 소년공초등학교를 마치자마자 당선인 일가는 성남의 빈민촌에 정착했다. 나이가 어렸던 그는 다른 사람의 신분과 이름을 빌려 여러 공장을 전전했다. 실제로는 취업할 수 없는 소년공이었지만, 신분이나 이름으로는 성인인 채로 거친 공장 생활을 하면서 수많은 사고를 당했다.
당시의 사고 때문에 그의 손가락에는 아직도 고무 조각이 박혀 있고, 후각 세포도 55% 이상 괴사해 지금도 냄새를 잘 맡지 못한다.
프레스 기계에 팔이 눌리는 큰 사고도 당했다. 당시 노동법에 산업재해 보상 조항이 있었지만, 누구도 사고 책임을 지지 않았다. 기계보다 값싼 노동력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치료받지 못한 팔은 멋대로 비틀어졌고, 이후 굽은 팔을 가리려 사시사철 긴소매만 고집하게 됐다. 이 왼팔 장애로 병역 면제를 받았다. 학교도 다니지 못했는데 군대조차 갈 수 없다는 건 또 하나의 좌절이었다. 그저 평범한 삶을 살며 차별받지 않는 것이 소망이었다.
부상 후유증으로 잠시 일을 쉬는 사이 그는 공부에 매진해 고입과 대입 검정고시에 잇따라 합격했다.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각고의 노력으로 고졸 신분이 됐지만, 기회가 차단된 환경에서 다시 공장 노동자 신세를 이어가야만 했던 현실에 좌절감은 더욱 컸다.
◇ '전화위복' 법대 입학1980년 전두환 정권이 단행했던 교육개혁 조치가 당선인의 인생에 전화위복이 됐다. 본고사가 폐지되면서 학력고사만으로 대학에 갈 수 있게 됐고, 과외가 금지되면서 장학금 제도가 대폭 늘었기 때문이다.
그는 생계를 위한 공장 일과 공부를 독하게 병행해 마침내 학력고사에서 전국 순위 3000등 안에 드는 고득점을 냈다. 인권이 유린 당한 삶에서 벗어나고픈 지독한 갈망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서울대 입학도 가능했지만, 그는 고심 끝에 전액 장학금에 매월 생활비 30만 원이라는 파격 조건을 내건 중앙대 법학과에 진학했다.
중고교 시절 정상적인 학창 생활을 경험해보지 못했던 그는 교복도 입어보지 못한 한을 풀고자 대학 입학식에 아무도 입지 않는 대학 교복을 맞춰 입었다. 그리고 학교에서 주는 생활비 일부를 다달이 셋째 형에게 보내 공부를 도왔다. 7남매 중 대졸자는 그와 셋째 형 둘 뿐이다.
훗날 부당한 시정개입 등을 이유로 갈등을 빚었던 바로 그 형이다.
1982년 그는 우연히 유인물로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접했다. 매스컴의 말대로 광주시민은 폭도라 믿었던 당선인이었다. 권력과 언론에 속았다는 분노는 정의구현을 향한 의지로 바뀌었다.
◇ 판검사 버리고 택한 인권변호사1986년 제28회 사법고시에 합격한 그는 사법연수원에서의 성적도 좋았다. 하지만 그는 판검사 임용을 앞두고 갈등했다. 군사정권의 주구가 되지 않겠다는 소신과 집안 형편 사이의 고민이었다.
당시 인권변호사였던 노무현의 강의를 듣고 그의 철학에 매료된다. "변호사는 굶지 않는다"던 그의 말을 믿어보고 싶었다.
1987년 7월14일 이재명은 일기장에 이러한 결의를 남겼다. '수없이 많은 사람이 나의 지식과 자격을 필요로 한다. 역사가, 민족이, 노동자가 핍박받고, 가난한 민중이 나를 필요로 하고 있지 아니한가.'
그는 변호사를 선택했다. 어머니와 주변에는 성적 때문에 변호사를 하게 됐다고 둘러댔다. 차마 판검사 자리를 제 발로 차버렸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 치열했지만 한계였던 시민운동변호사 이재명은 성남에서 주로 노동과 인권사건 변호를 맡으며 민변 활동을 했다. 시민과 뜻을 모아 ‘성남시민모임’을 창립하며 시민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백궁·정자지구 용도변경 특혜의혹’과 ‘파크뷰 특혜분양 사건’을 파헤쳤다. 정치권력, 언론, 돈, 조직 등과 정면으로 맞붙어 싸웠지만, 거대한 부패 기득권 세력 앞에 한계를 절감하기도 했다.
2004년 성남 구시가지의 대형병원들이 문을 닫으며 의료공백이 심각했다.
공공의료원 설립을 목표로 시민 2만 명의 뜻을 모아 주민 발의 조례를 만들었는데, 단 47초 만에 시의회의 날치기를 당한다. 한 교회 지하실에서 서럽게 울던 그는 시민의 권한을 대리하는 시장이 돼 직접 시립의료원을 만들겠다고 마음먹었다.
◇ 시민이 주인인 성남당선인은 2010년 51.2%의 득표율로 성남시장에 당선됐다. 시장이 된 그가 처음 마주한 것은 6500억 원이 넘는 부채였다.
이를 청산하기 위해 곧바로 허리띠를 졸라맸다. 부채 청산과 복지의 비결은 이른바 ‘3+1 원칙’이다. 부정부패, 예산낭비, 세금탈루를 없애고 그렇게 아낀 예산으로 공공성을 강화하는 것이다.
시장실도 2층으로 옮겨 누구나 드나들 수 있게 했다. ‘아방궁’이라 비난받던 기존 9층 시장실에 아이사랑놀이터와 북카페를 만들어 시민들에게 개방했다.
SNS로 시민과 적극적으로 의견을 나누며 시정을 알리고 보완했다. 2013년 마침내 정치 입문의 계기이자 공공성의 상징인 시립의료원의 첫삽을 떴다.
2014년 득표율 55.1%로 재임에 성공했는데, 이때 보수가 우세한 분당에서 오히려 득표율이 오르는 이변이 일어났다.
실적과 실력만으로 불리한 정치지형을 극복해낸 것이다. 하지만 여소야대의 시의회 돌파는 녹록지 않았다. ‘청년배당·산후조리·무상교복’으로 대표되는 3대 무상복지 역시 시민과 손잡고 지난한 과정을 거쳐 이룬 결실이었다.
성남시장으로서 살림, 소통, 복지, 공약이행 등에서 당선인이 이룬 업적은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다. 하지만 두드러지는 업적은 시민의 주권 의식을 공고히 한 것이다. ‘시민이 주인인 성남’이라는 슬로건처럼 그는 언제나 시민이 주권자이고 정치인은 대리인일 뿐임을 강조했다.
◇ 나침반은 오직 ‘공정함’흙수저로 태어나 가혹한 환경을 경험한 이재명의 나침반은 언제나 ‘공정’이었다. 2016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졌을 때 정치적 유불리를 따지지 않고 국민과 가장 가까운 촛불의 선봉에서 박근혜 퇴진을 부르짖었던 이유다.
진정성을 알아본 국민은 그를 단숨에 대선 경선 후보로까지 불러냈다. 이때 이재명은 정의롭고 공정한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소명을 분명히 했다.
당선인은 누구나 살고 싶어 하는 복지도시 성남을 만들었던 경험을 토대로 도민 누구나 자긍심을 느끼는 새로운 경기도를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 '경기 퍼스트' 추진당선인의 최우선 정책은 ‘경기 퍼스트’이다. 서울의 변두리가 아니라 최고 삶의 질을 자랑하는 대한민국 중심도시로 만드는 정책이다. 경기도의 모든 잠재력·기회·자원·역량이 온전히 경기도와 도민을 위해 쓰겠다는 생각이다.
경기북부를 통일경제특구로 추진해 남북교류협력 사업을 강화할 계획이다. 경의선·경원선 복원사업을 추진하고 미군 반환공여지도 국가주도로 개발할 방침이다.
지역화폐와 무상복지 사업을 연계해 복지 체감도를 높이고, 골목경제를 활성화하는 순환경제 모델을 경기 전역에 확대할 계획이다. 무상교복·산후조리비지원·무상급식 등 이미 성남에서 성과를 입증한 3대 무상시리즈 브랜드도 경기 전역으로 확대한다.
청년배당이나 산후조리를 지역화폐로 지급해 전통시장과 골목상권에 써 골목경제도 키울 계획이다.
당선인은 "경제민주화로 공정한 경기도를 만들겠다. 경기도의 경제민주화 지원 등에 관한 조례를 개정해 '경기도형 상생경제시스템' 구축을 위한 행정조직을 정비하겠다"며 "제조업과 건설업 분야 하도급, 가맹점, 대리점 등에 불공정 행위를 철저히 단속하고 근절할 수 있는 제도적 시스템을 만들겠다"고 말했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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