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발목을 잡는 과거가 있고 그릇된 편견과 관행들이 우리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있었는데, 우리는 모든 것을 이겨내고 이 자리에 왔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과거에 대한 소회로 12일 북미 정상회담의 문을 열었다. 싱가포르에서 두 정상이 마주앉기까지 1948년 이후 70년이 걸렸다. 그간 반목과 대화를 거듭하면서 얼마나 요동쳐 왔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북미관계는 상호 적대감정이 격화된 냉전체제를 거쳐 북한의 핵개발이 본격화된 90년대 이후 간간이 대화의 문이 열렸지만 비핵화 협상과 합의 파기, 도발이 반복되면서 도로 제자리걸음에 그쳤다. 이 같은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수십 년 간 견고하게 쌓인 불신의 벽을 먼저 깨뜨리는 것이 관건이었다. 마침내 비핵화를 접점으로 북미 간 최초의 정상회담이 열리면서 양국은 그간의 해묵은 감정을 털어내고 새로운 판을 짤 중대 기로에 섰다.
김일성(1948~1994년) ‘대미 항전기’1948년 단독정부를 수립한 남북은 제각기 정권의 정통성을 강조하는 데 주력했다. 이승만 정권이 내부 반공의식을 키웠던 것처럼 김일성 주석 역시 대미 항전 의식을 체제 결속 수단으로 삼았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체결로 한반도에서 전면전의 위기감은 낮아졌지만 북한은 ‘철천지 원수’ 미국과의 대결 의식을 고취시킬 실질적 행동이 필요했다.
푸에블로호 나포와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이 대표적이다. 북한은 1968년 1월 강원도 원산 앞바다에서 83명이 승선한 미국 해군 정보함 푸에블로호(USS Pueblo)를 나포해 원산항으로 끌고 갔다. 미국이 이듬해 12월 북한에 굴욕적으로 사과하고 나서야 승무원들이 돌아왔다. 북한은 푸에블로호를 대동강변으로 옮겨 지금도 대미 항전 승리의 선전물로 내세우고 있다. 이어 1976년 8월 북한군이 공동경비구역(JSA) 안에서 미루나무 가지 치기를 하던 미군 장교 2명을 살해한 도끼만행 사건까지 터지면서 한반도는 일촉즉발의 긴장감으로 치달았고, 북미 간 적대감은 최고조에 달했다.
두 사건으로 초강대국 미국은 자존심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북한이 눈엣가시로 부각된 것은 이때부터다. 끊임없이 대북 감시망을 가동하고 우방국인 한국, 일본과의 관계를 강화하며 때론 엄포를 놓으면서 북한과의 앙금이 쌓여갔다.
1990년대 들어 북한은 궁지에 몰렸다. 전통적 우방인 소련과 중국이 각각 91년과 92년 한국과 수교를 맺자 한반도에 탈냉전 기류가 무르익었다. 이에 맞서 김일성 주석은 북미관계를 개선하거나 독자생존에 나서야 하는 선택에 직면했다.
91년 12월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은 북한이 미국을 향해 손을 내민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북한은 이내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특별사찰에 반발하며 93년 3월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했다. 전세계를 상대로 핵개발을 공식화하며 선전포고를 한 셈이다.
이에 클린턴 행정부는 94년 영변 핵 시설에 대한 ‘정밀폭격(surgical strike)’까지 검토하는 극약처방을 내리며 북한을 압박했다. 94년 10월 북미 제네바 합의로 경수로 제공과 핵 동결을 맞바꾸면서 핵 위기는 일단 봉합됐지만, 핵 문제는 이때부터 북미관계를 규정하는 최대 변수로 자리잡았다.
김정일(1994~2011년) ‘협상과 실패의 반복’김 주석 사망 후 권력을 승계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북미관계 개선이 불가피해 보였다. 공산권 붕괴와 잇단 자연재해로 90년대 중반 불어 닥친 ‘고난의 행군’에서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였다. 체제 존립의 마지노선인 배급제 마저 무너지면서 경제가 피폐해진 북한은 과감히 대미관계 개선에 나섰다.
2000년 10월 조명록 북한 국방위 제1부위원장이 김정일 위원장의 특사로 워싱턴을 방문, 백악관에서 빌 클린턴 대통령을 만났다. 공동 코뮈니케를 통해 북미 간 신뢰구축과 적대관계 청산, 경제교류 협력 약속 등의 성과도 냈다.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곧바로 평양을 답방하면서 북미 정상회담이 눈 앞에 다가온 듯 했다.
하지만 2002년 조지 부시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가까스로 비핵화로 가닥을 잡았던 북한은 다시 핵개발 노선으로 뒷걸음질쳤다. 부시 정권은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대북압박 노선을 공식화했다. 북한은 2003년 1월 결국 NPT를 탈퇴, 핵개발 카드를 다시 집어 들었다.
핵 위기가 재차 불거지고 북미관계가 악화하면서 한반도 주변국이 참여하는 6자회담에 시동을 걸었다. 북한이 2005년 NPT와 IAEA 복귀를 약속하고, 검증 가능한 비핵화가 명시된 9ㆍ19 공동성명에 합의하면서 한때 장밋빛 청사진이 난무했다. 반면 북한의 비자금 창구인 마카오의 방코델타아시아(BDA)에 대한 미국의 제재는 좀체 풀리지 않았다. 북한은 결국 2006년 7월 대포동 2호 미사일을 발사하더니, 같은 해 10월 1차 핵실험을 감행했다.
김정은(2012년~) ‘대반전 모색’2011년 12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숨지고 3대 세습으로 권력을 물려받은 어린 지도자 김정은에 전세계는 주목했다. 스위스 유학 등 서구적 경험을 바탕으로 유연하게 북미관계에 변화를 줄 것이라는 기대감이 커졌다.
결과는 정반대였다. 오바마 행정부의 첫 대북 성과인 2012년 2ㆍ29합의가 채 두 달도 안돼 파기되자 대북 협상에 대한 회의감이 미 행정부를 뒤덮었고, 북핵은 중동문제의 뒷전으로 밀렸다. 북한은 같은 해 5월 헌법에 핵 보유국임을 명시하더니, 이듬해 3월에는 핵개발ㆍ경제발전 병진노선을 채택해 거침없이 핵에 대한 열망을 공식화했다. 이후 미 본토를 겨냥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개발과 추가 핵실험을 거듭했다.
오바마 행정부의 ‘전략적 인내’로는 북한의 폭주를 감당할 수 없었다. 반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화염과 분노에 직면할 것”이라며 최대의 압박으로 북한을 몰아세웠다. 대북 군사적 옵션마저 공공연하게 거론됐다. 이에 맞서 북한은 미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화성-15형 시험 발사에 성공했고, 북미 간 대결수위는 극에 달했다.
그 결과 한반도가 전쟁과 협상의 갈림길에 섰다. 문재인 정부는 북미 간 대화를 중재하는데 모든 외교력을 쏟았다. 문 대통령은 4ㆍ27 남북 정상회담을 계기로 김정은 위원장의 확실한 비핵화 의지를 트럼프 대통령에게 전달했다. 이번 북미 정상회담은 그간의 오랜 산고 끝에 어렵게 세상에 나온 옥동자나 마찬가지다.
북미 정상 간 전례 없는 비핵화 합의에 이르면서 이제 관심은 합의 이행에 쏠리고 있다. 순조롭게 진행되면 북미는 수교를 거쳐 정상국가 간 우호관계로 거듭날 것이다. 반면 과거와 같은 약속과 파기의 역사가 또다시 반복될 경우, 사실상의 핵 보유국 반열에 오른 북한을 제어하기 위해 미국이 상상을 뛰어넘는 수준의 강력한 채찍을 동원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조영빈 기자 peoplepeopl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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