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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에블로호에서 싱가포르까지, 대화와 반목 거듭해온 북미관계 6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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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에블로호에서 싱가포르까지, 대화와 반목 거듭해온 북미관계 65년

입력
2018.06.12 14:59
수정
2018.06.12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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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발목을 잡는 과거가 있고 그릇된 편견과 관행들이 우리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있었는데, 우리는 모든 것을 이겨내고 이 자리에 왔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과거에 대한 소회로 12일 북미 정상회담의 문을 열었다. 싱가포르에서 두 정상이 마주앉기까지 대화와 반목을 거듭해온 65년의 역사가 얼마나 크게 굽이쳐 왔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1953년 7월 한국전쟁이 끝나자 북미 양국은 냉전체제의 경직된 대결구도로 급속히 빨려 들어갔다. 북한은 내부 결속을 위해 반미 투쟁을 부추겼고 북미는 서로를 적대시했다. 1990년대 냉전이 해체됐지만 북미관계는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북한이 체제보장 수단으로 핵개발을 본격화하면서 간간이 대화의 문이 열리기도 했지만 비핵화 협상과 합의 파기, 도발이 반복되면서 제자리걸음에 그쳤다.

이 같은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수십 년 간 견고하게 쌓인 불신의 벽을 어떻게 해소하느냐가 관건이었다. 싱가포르에서 역사적 정상회담이 열리면서 비핵화와 북미관계는 그간 해묵은 앙금을 털어내고 새로운 판을 짤 중대 기로에 섰다.

김일성(1953~1994년) ‘대미 항전기’

1950년부터 3년 간 한반도를 피로 물들인 전쟁이 끝난 뒤 김일성 주석은 대미 항전 분위기를 강화했다. 북한 체제의 기반을 굳건히 하고 내부를 결속하기 위해 미소 간 살벌하게 노려보는 냉전구도를 적극 활용했다.

푸에블로호 나포와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이 대표적이다. 북한은 1968년 1월 강원도 원산 앞바다에서 83명이 승선한 미국 해군 정보함 푸에블로호(USS Pueblo)를 나포해 원산항으로 끌고 갔다. 미국은 이듬해 12월 북한에 사과하고 승무원들을 돌려받았다. 북한은 푸에블로호를 대동강변으로 옮겨 지금도 대미 항전 승리의 선전물로 내세우고 있다. 이어 1976년 8월 북한군이 공동경비구역(JSA) 안에서 미루나무 가지 치기를 하던 미군 장교 2명을 살해한 도끼만행 사건까지 터지면서 한반도는 일촉즉발의 긴장감으로 치달았고, 북미 간 적대수위도 최고조에 달했다.

두 사건은 북한이라는 작은 나라가 미국을 상대로 한 협상에서 승리했거나 미군에 대해 무력 도발을 감행한 충격적 사건으로 기록됐다. 미국은 북한을 눈엣가시로 끊임없이 감시하고 관리하며 불편한 감정을 이어갔다.

1990년대 들어 북한은 곤혹스러워졌다. 전통적 우방인 소련과 중국이 각각 91년과 92년 한국과 수교를 맺으며 한반도에 탈냉전 기류가 본격화 하면서다. 김일성 주석은 북미관계 개선 또는 독자 노선의 선택으로 내몰렸다.

미소 간 군축협상 흐름에 91년 12월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이 나오면서 북한이 미국을 향해 손을 내민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북한은 이내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특별사찰에 반발하며 93년 3월 핵확산금지조약(NPT)를 탈퇴했다. 전세계를 상대로 핵개발을 공식화하며 선전포고를 한 셈이다.

이에 클린턴 행정부는 94년 영변 핵 시설에 대한 ‘정밀폭격(surgical strike)’까지 검토하는 극약처방을 내리기도 했다. 94년 10월 경수로 건설을 대가로 핵 동결을 받아낸 북미 간 제네바 합의로 북핵 위기는 일단 봉합됐지만 북핵 문제는 이때부터 북미관계를 규정하는 최대 변수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김정일(1994~2011년) ‘협상과 실패의 반복’

김 주석 사망 후 권력을 승계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북미관계 개선이 불가피해 보였다. 공산권 붕괴와 잇단 자연재해로 1990년대 중반 불어 닥친 이른바 ‘고난의 행군’을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이다. 마지노선인 배급제 마저 무너지면서 경제가 피폐해진 북한은 과감히 대미관계 개선에 나섰다.

2000년 10월 조명록 북한 국방위 제1부위원장이 김정일 위원장의 특사로 워싱턴을 방문, 백악관에서 빌 클린턴 대통령을 만났다. 공동 코뮈니케를 통해 북미 간 신뢰구축과 적대관계 청산, 경제교류 협력 약속 등의 성과도 냈다.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곧바로 평양을 답방하면서 북미 정상회담이 눈 앞에 다가온 듯 했다.

하지만 2002년 조지 부시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가까스로 비핵화로 가닥을 잡았던 북한은 다시 핵개발 노선으로 뒷걸음질쳤다. 부시 정권은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대북압박 노선을 공식화했다.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은 10월 평양을 방문한 제임스 켈리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에게 “우리는 핵을 가질 권한이 있다. 그보다 더한 것도 갖게 되어 있다”고 맞불을 놨고 북한은 2003년 1월 NPT를 다시 탈퇴했다.

핵 위기가 재차 불거지고 북미관계가 악화하면서 한반도 주변국이 참여하는 6자회담에 시동을 걸었다. 2005년 NPT와 IAEA 복귀를 약속한 9ㆍ19공동성명이 도출됐다. 반면 북한 지도부의 비자금 창구로 알려졌던 마카오의 방코 델타 아시아(BDA)에 대한 미국의 제재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북한은 결국 2006년 7월 대포동 2호 미사일을 발사하고 같은 해 10월 1차 핵실험을 감행했다.

김정은(2012년~) ‘대반전 모색’

2011년 12월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으로 다시 권력을 물려받은 어린 지도자 김정은에 전세계는 주목했다. 스위스 유학 등 서방 세계와 친숙한 경험을 바탕으로 북미관계를 유연하게 가져갈 수도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커졌다.

결과는 정반대였다. 북한은 2012년 5월 헌법에 핵 보유국임을 명시하고 이듬해 3월 핵개발ㆍ경제 발전 병진노선을 채택했다. 이후 북한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개발을 위한 핵실험과 탄도미사일 시험발사를 거듭했다. 오바마 행정부는 폭주하는 북한을 막지 못했다. 2ㆍ29합의마저 파기되자 대북 협상에 대한 회의감이 미 행정부를 뒤덮었고, 북핵 문제는 중동문제의 뒷전으로 밀렸다.

오바마 행정부의 미온적 대북정책을 강하게 비판해온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화염과 분노에 직면할 것”이라며 최대의 압박(maximum pressure) 정책을 폈다. 미국 내에선 대북 군사적 옵션이 공공연하게 거론됐다. 북한은 그 사이 미국 본토를 사정권에 둔 화성-15형 시험 발사에 성공하며 북미 간 대결수위는 극에 달했다.

전쟁과 협상의 갈림길에서 문재인 정부는 북미 간 대화를 중재하는데 외교력을 쏟았다. 4ㆍ27 남북 정상회담을 계기로 김정은 위원장의 확실한 비핵화 의지를 트럼프 대통령에게 전달했다. 12일 북미 정상회담은 그간의 오랜 진통이 낳은 옥동자나 마찬가지다.

북미 정상 간 전례 없는 비핵화 합의에 이르면서 이제 관심은 합의 이행에 쏠리고 있다. 순조롭게 진행되면 북미는 정식 수교를 거쳐 우호관계로 거듭날 수 있다. 반면 과거와 같은 약속과 파기의 역사가 반복될 경우, 결국 핵 보유국 모자를 쓴 북한을 제어하기 위해 미국이 동원해야 할 채찍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질 수밖에 없다.

조영빈 기자 peoplepeopl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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