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 우선 공통 기질이 만든 정상회담
미지근한 합의론 내부적 후폭풍 클 것
불신의 벽 허물고 역사 물줄기 바꾸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국내 정치적 입지는 그리 탄탄하지 않다. 지난 대선의 러시아 개입을 수사 중인 뮬러 특검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고, 정치적 경쟁관계인 민주당은 사사건건 발목을 잡는다. 지금 민주당에는 북핵 문제 해결보다 트럼프의 지지율을 떨어뜨리고 재집권을 막는 게 우선이다. “대통령답지 않은” 트럼프가 클린턴이나 오바마도 못한 북핵 문제를 해내는 건 그들에게 무척이나 자존심 상하는 일이기도 하다.
일인 지배체제라도 최고권력자에 대한 개인 숭배가 과거보다 약화된 상황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도 안심할 수 없는 처지다.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군 수뇌부를 교체한 것은 역으로 군부의 동요 가능성을 보여 준다. 북한 정권이 통제할 수 없을 만큼 커져버린 풀뿌리 자본주의는 ‘선군(先軍)정치’에서 ‘선경(先經)정치’로의 전환의 불가피성을 웅변한다. 인민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김정은의 지도자 자격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
북미 정상회담이라는 역사적 이벤트는 트럼프 대통령과 김 위원장의 야심과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다. ‘은둔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정상국가 지도자’가 되려는 김정은의 바람과 북핵 문제를 해결해 정치적 자산으로 삼으려는 트럼프의 정치적 노림수의 산물이다. 실리를 위해서라면 기성의 문법을 벗어난 결정과 행동을 주저하지 않는 비슷한 기질을 소유했기에 가능했다. 북미가 여기까지 온 것은 두 정상의 의지가 절대적으로 작용한 셈이다. 하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정상회담의 부실한 성과는 전적으로 두 사람 책임으로 귀결될 수 있다.
북미 정상회담에서 나올 합의문은 낮은 수준에 그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비핵화와 체제보장의 원칙과 방향에 대한 큰 틀의 포괄적 합의만 담기고 ‘디테일’은 후속회담으로 넘기리라는 관측이 많다. ‘CVID(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에서 특히 ‘불가역’ 부분이 문제인 모양이다. 확신할 수 없는 체제보장과 ‘패전국 수준의 핵무력 포기’를 맞바꾸기에는 위험 부담이 너무 크다고 북한 정권은 판단했을 것이다.
문제는 이런 미지근한 성과가 나올 경우의 후폭풍이다.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초강경 수준의 ‘5대 원칙’을 트럼프 대통령에게 통보한 민주당은 “실패한 협상”이라며 공세를 퍼부을 게 뻔하다. 김 위원장도 ‘립 서비스’만 받고 비핵화를 약속한 데 대한 내부 반발이 없으리라고 장담할 수 없다. 핵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실험 중지와 핵실험장 폐기까지 내준 터라 더 곤궁한 상황이다.
이번 회담은 발표 결과를 정해 놓은 상태에서 형식적으로 이뤄지는 통상의 정상회담과 달리 두 정상의 막판 담판 몫으로 남겨 둔 부분이 적지 않다. “이번이 단 한 번의 기회”라는 트럼프 대통령의 언급은 가급적 담판을 짓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국가 정상 간 담판 중에서 1985년 미국 레이건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제네바 회담이 인상적이다. 전 세계가 ‘빅딜’을 기대했던 회담에서 두 정상은 논의가 격앙되자 산책을 나가 호숫가 오두막에서 담소를 나누며 불신의 간격을 좁혔다. 두 정상은 그 후 후속 정상회담을 잇달아 열어 역사적인 군비 축소에 합의할 수 있었다.
역사를 바꾼 ‘세기의 담판’들의 공통점은 정상 간의 신뢰다. 과거 북미 간에 여러 차례의 합의가 깨진 것도 서로를 믿지 못했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과 김 위원장은 센토사 섬에서 함께 햄버거를 먹거나, 해변을 거닐거나, 서로의 친구인 데니스 로드맨을 불러 농구시합을 하며 친분을 쌓을 수도 있을 것이다.
김 위원장이나 트럼프 대통령이나 이제 되돌아가기에는 너무 먼 길을 걸어왔다. 70년간 적대관계에 있던 양국 정상이 처음 마주 앉은 것만으로도 의미가 크지만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성과가 있기를 전 세계인은 기대한다. 지구상에 마지막 남은 ‘냉전의 섬’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라는 한국인들의 염원은 더 간절하다.
수석논설위원 cjlee@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