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는 1957년 열렸다. 한국전쟁의 후유증이 여전할 때였다.
당시의 가부장적 사회 분위기로선 상당히 파격적인 이벤트였다. 이 신선하고 매력적인 행사는 단숨에 온 국민의 관심을 사로잡았고, 금세 국가적 이벤트로 자리잡았다.
이 시기 미스코리아의 위상은 국제대회에 출전하는 국가대표 선수 못지 않았다.
이들은 미스 유니버스 대회 출전에 앞서 경무대(청와대)를 예방했다. 이듬해 제2회 대회부터는 전야제와 시가행진도 펼쳐졌다. 20만 명에 달하는 서울 시민이 나와 미스코리아 후보자를 응원했고, 시가 행진엔 미군 해병 고적대와 국군 해병군악대까지 동원됐다.
초창기 미스코리아는 ‘KOREA’라는 브랜드를 세계에 알리는 민간외교사절단 역할을 톡톡히 해냈기 때문에 정부의 관심도 남달랐다.
이들의 역할을 높이 평가한 정부는 미스코리아를 아낌없이 지원했다. 1960년대엔 대통령 내외가 미스코리아 대회 진∙선∙미를 공식 접견했다.
창경궁(1961)과 경복궁(1963~66)에서 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말 그대로 국가적 행사였던 셈이다.
미스코리아들의 해외 활약상도 빛났다.
1959년 제3회 대회 ‘진’ 오현주는 그 해 미국에서 열린 미스 유니버스 대회에 출전해 스피치상, 스포츠상, 선외상(6위) 등을 휩쓸었다.
더불어 해당 대회 참가자 및 관중 전원이 투표해 선출하는 인기상을 수상해 화제가 됐다.
또 1963년 제7회 대회 ‘진’ 김명자는 같은 해 미스 유니버스 대회에 출전해 한국인 최초로 미스 유니버스 TOP 5에 드는 기염을 토했다. 덕분에 대회에 대한 국민적 관심은 더욱 커졌다.
1,2회 대회 때는 미스코리아 1인과 준미스코리아 2인을 포함해 총 3인만 뽑다가 제3회 대회부턴 미스 한국일보도 선발됐다.
1960년 대회부턴 현재 미스코리아 주요 시상형태인 진∙선∙미 체제가 도입됐고, 1969년까진 준미스코리아도 진∙선∙미로 나눠 시상했다.
대회 장소도 명동시립극장, 서울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 위치)과 대한극장, 서울운동장(동대문운동장, 현 DDP) 특설무대나 창경궁 특설대회장으로 옮겼다.
미스코리아를 향한 대중의 폭발적인 호응과 지지를 수용해야 했기 때문이다.
유수경 기자 uu84@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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