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향력 있는, 저명한 저자라서가 아니라 마사 누스바움의 책들은 전반적으로 문턱이 조금 있다. 일단 유대인이다. 그래서 유대-기독교적 전통에 관한 얘기가 많다. 또 학부에서 연극과 고전문학을 공부했다. 그 덕에 그리스 비극 등 고전 철학과 문학에 대한 이야기가 넘쳐난다. 마지막으론 법윤리학자다. 논증해야 하는 입장이라 무슨 주제를 다루건 용어 하나마다 정의를 내린 뒤 그 용례를 따져가며 ‘이 경우에는 첫째, 둘째, 셋째’ 하는 식으로 한 단계씩 천천히 앞으로 나아간다.
‘분노와 용서’ 이 책도 그렇다. 시작부터 이 책은 기원전 5세기 고대 그리스 비극, 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이아’ 이야기를 꺼낸다. 흉측한 짐승처럼 묘사되는 복수와 분노의 여신 ‘퓨리’가 자비의 여신 ‘에우메니데스’로 어떻게 변신하는가를 다루더니, 이내 그리스ㆍ로마 시대 철학자들과 에피쿠로스 학파ㆍ스토아 학파에 이어, 회개와 용서에 관한 유대인의 전통 ‘테슈바’를 설명하고, 성경의 여러 일화들까지 버무린다. 묵직한 발걸음을 느릿느릿 옮겨가는, 전작들의 행보를 이 책도 고스란히 따라간다.
‘분노와 용서’가 고마운 지점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이 책은 그래도 2014년 영국 옥스포드대에서 진행된 ‘존 로크 강좌’에 바탕을 뒀다는 점이다. ‘입말’로 쓰여있다 보니 누스바움 특유의 느린 진행이, 지루한 논증보다는 조근조근한 설명으로 받아들여진다. 가끔 분노가 치미긴 하는데, 이 정도 템포라면 그래도 용서해주자. 제목도 하필이면 ‘분노와 용서’니까.
또 한가지 이유는 저자가 ‘미국 여성’이라는 점이다. 강연이나 학술대회 일정 때문에 여행 다닐 일이 있을 때 신사도를 발휘하겠답시고 짐을 대신 실어주겠다고 나서는 남성들을 무척이나 귀찮아 할 정도로, 운동으로 다져진 스스로의 몸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당찬 여성이라는 점이다. 이 두 가지 점이 고마운 이유는 이 책의 주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 책의 주제는 이렇다. “분노는 지위에 지나칠 정도로 초점을 맞추거나, 전혀 말이 되지 않는 인과응보에 대한 환상을 체현하고 있거든요. 둘 중 어떤 경우든 사람들은 이미 발생한 나쁜 행위를 진실되게 인정하는 한편, 다른 사람들의 복지와 미래를 만들어내는 일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저자가 보기에 이미 벌어진 부당한 행위는 되물릴 방법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상대가 모욕감을 느낄 사과를 고집스레 요구하고, 나의 피해만큼 너도 손해를 봐야 한다는 논리를 들이대는 건 자기만족 외엔 아무 것도 얻는 게 없다. 이런 보복 심리를 저자는 “마법적 사고” 혹은 “전 우주적 균형이라는 기이한 형이상학”이라고 비꼰다. 분노와 보복은 천한 감정이며, 그런 천박함에서 벗어날 때 오히려 나의 삶은, 우리의 삶은 고양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무조건 용서하란 말인가. 저자는 ‘무조건 용서’ 또한 거부한다. ‘무조건’이라는 표현에는 자신의 도덕적 우위를 확신한다는, 묘한 우월감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무조건적 용서라는 것도 실은 분노의 다른 형태라 할 수도 있다. “용서는 가끔 도움이 될 지 모르나, 용서를 옹호하는 주장은 과장되어 있습니다. 분노에 용서로 맞서는 싸움을 직업으로 삼는 종교적ㆍ의료적 전문가들 때문이죠. 이런 전문가들은 분노와의 투쟁을 필수적이고 가치 있는 것으로 표상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으니까요.”
그러면 대체 어쩌란 말인가. “훨씬 더 전도유망한 방법이 있습니다. 내면의 상태에 대해 생각하기를 멈추고, 어떻게 해야 무언가 쓸모 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아량을 베푸는 일을 할 수 있을 지 생각하는 방법 말입니다.” 소중한 자기를 연신 쓰다듬으며 “나 분노했어!”라고 외쳐대기보다는 아량을 베푸는 게 더 성숙한 자세라는 얘기다.
그래 맞다. 저자가 이런 논리로 저격하려는 것은 바로 그 ‘정의를 위한 분노’다. 아니, 이게 가능한 말인가. 미투, 위드유에, 재벌가 갑질 파문과 일베에다, 불평등과 국정농단에서부터 적폐청산에 이르기까지 분노가 필요한 일들이 그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감히 이 따위 소리를 늘어놓을 수 있는가. ‘조근조근한 설명’을 ‘미국 여성’이 해줘서 고맙다는 얘기는 그래서다.
오해를 피하자면 몇 가지 조건이 있다. 일단 저자는 사법영역까지 건드리지 않는다. 그러니까 형사처벌을 받아야 할 ‘여혐’이나 ‘성추행’, ‘갑질’ 기타 등등이라면 당연히 법 절차에 따라 처벌받아야 한다. 저자가 경계하는 건 그것을 넘어서는 분노다. 둘째, 저자는 분노의 가치를 아예 부정하지는 않는다. 분노는 분명 정신적 각성을 돕는다. 포인트는 이성을 잃지 말라는 것이다. 분노 이후 그 다음엔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차분히 생각해보라는 얘기다. 그걸 저자는 ‘이행-분노(Transition-Anger)’라 부른다. 분노에서 벗어나 빨리 이행으로 이동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저자의 설득 대상은 어디까지나 피해자라는 점이다. 이 책을 읽었다고 “거봐, 아량을 베풀어야 한다니깐”라고 가해자가 말하고 다닌다는 건 또 다른 교활한 가해다.
분노와 용서
마사 누스바움 지음ㆍ강동혁 옮김
뿌리와이파리 발행ㆍ584쪽ㆍ2만8,000원
저자는 피해자 내부에서 심사숙고 끝에 “아니야, 이렇게 분노에 가득 차 사과와 처벌을 집요하게 요구하는 것은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이 안돼”라는 목소리가 먼저 나와야 한다고 바라는 셈이다. 가해와 피해의 관계, 그리고 용서와 아량의 문법에 대해 고민하는 이라면 누스바움의 묵직한 발걸음을 한번 따라가볼 필요가 있다. 아직도 곱씹는, 남 모를 피해의 기억이 있다면 500쪽을 넘어가는 이 책이 의외의 위안을 줄 지도 모르겠다. 저자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북한’도 이런 시각으로 봐야 한다 주문해뒀다.
조태성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