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들이 책 선물 많이 보내
요즘 이해인 시집 읽고 있는데
조금씩 끊어가며 아껴 읽어
가사도 쓰려 노력하는데
책과 영화에서 영감을 얻어
글 쓰면 내가 풍요로워지죠
인터뷰 당일 감기 기운이 있어 담요를 살짝 쓰고 있던 예은의 안부가 궁금하던 차에 그에게서 문자메시지가 왔다. ‘인생에서 너무 늦은 때란 없습니다’란 책이 찍혀 있는 사진 파일이었다. 팬이 보낸 책이라고 했다. 책을 보내주는 팬이 있을 리 만무하기에 진즉에 알아서 책을 사 읽은 나는 책장 어딘가에 꽂아둔 그 책을 다시 꺼내 들었다. 이 책의 소감을 뭐라 말하려나. 물으면 나도 뭔가 받아 치기는 해야 할 것 같아 후루룩 책장을 훑는데 읽고 좋았던 책 얘기를 해보라니까 깨 볶듯이 말이 사방으로 튀던 예은의 목소리가 가까이서 들리는 듯했다. 그러니까 읽고 사는 사람, 예은의 이야기다.
김민정(민정)= 책을 많이 읽는다고 들었어요.
예은(예은)= “어머, 제가요? 아닌데, 진짜 아닌데. 지난번 싱글앨범 수록곡 중에 ‘나란 책’이란 노래가 있는데요, 그 제목 때문에 그렇게들 느끼신 게 아닐까 싶어요(웃음).”
민정= “나란 책이라… 노랫말이 궁금해지는데요. ‘(스마트폰으로 가사를 검색했다) 나란 앤 보기보다 복잡해서 읽어주면 좋을 텐데 모든 페이지를 다 펼쳐서 감춰놓았던 상자를 열어서 여섯 살 동생이 태어나던 때와 열두 살 분노를 처음 배운 때와 열다섯 남겨졌다는 두려움과 그리고 열여덟 가슴 벅찼던 꿈 넌 무슨 얘길 할까…’ 성장통이 느껴지는 노래 같은데 직접 가사를 썼네요.”
예은= “곡 작업을 어렸을 때부터 하긴 했는데요, 본격적으로 제 노래로 발매를 시작한 건 2008년이었어요. 한 서른 곡쯤 되려나요. 많지 않아요. 하나를 만들어도 진짜 제 마음의 조각들을 떼어서 넣는 편이라서 다작은 못 해요. 작사는 즐거운데 작곡이 어렵더라고요. 영화나 책을 보면서 영감을 많이 얻는 편이에요.”
민정= “꼬박꼬박 일기를 쓰는 편인가요? 왜 매일 매일의 기록이 작사의 아이디어로 이어질 수도 있는 거잖아요.”
예은= “일기보다는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 같아요. 사실 책 선물을 많이 받거든요. 어떤 선물을 받고 싶은지 팬들이 물으셔서 책이나 음반이 좋다, 라고 한 적이 있는데 이후부터 엄청 보내주세요. 유행하는 책들이 겹치기도 하니까 요즘 뭐가 ‘핫’한 책인지 저절로 알게도 되고 그래요.”
민정= “그렇게 해서 알게 된 나만의 책이랄까, 아끼는 책이 있다면요.”
예은= “데이비드 마추켈리의 ‘아스테리오스 폴립’이라고 그래픽 노블인데요, 그 책 되게 좋아해요. 요즘도 자주 꺼내서 읽어요. 요시다 슈이치의 ‘일요일들’이나 ‘퍼레이드’도 재미나게 읽은 책이고요. 일상의 소소함을 아름답게 그린 책을 보면 우리가 사는 일에 안도하게 되는 어떤 면이 있잖아요.”
민정= “어릴 때부터 책 많이 읽는 조숙한 어린이, 예은이었나 봐요.”
예은= “에이 특별하지는 않았어요. 근데 그때 만난 셰익스피어 책이 또렷하게 기억나요. 집에 어린이용으로 나온 ‘셰익스피어 4대 비극’과 ‘셰익스피어 5대 희극’이 있었거든요. 그 중 ‘햄릿’읽으면서 어린 마음에 충격을 좀 받았던 것 같아요. 오필리어라는 캐릭터에 꽂혀서 혼자 대사 읊어가며 연기도 해보고 그랬다니까요. 희극보다는 비극 쪽이 제 성향인데 그 ‘미침’이라는 게 상당히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것 같아요. 일찍부터 슬픔을 좀 찾아 다니는 성격이긴 했거든요.”
민정= “슬픔을 찾아다니는 성격이라… 나를 객관적으로 볼 줄 아는 이의 표현이다 싶은데요.”
예은= “저는 제 자신을 타자화해서 보려고 많이 노력해요. 제가 AB형인데요, A형으로서의 제가 어떤 행동을 할 때 B형으로서의 제가 그걸 날카롭게 쳐다보고 있는 게 느껴져요. 마찬가지로 B형으로서의 제가 어떤 말을 할 때 A형으로서의 제가 그걸 날을 세워 듣고 있는 걸 느끼거든요. 저를 견제하는 제가 언제나 제 안에서 요동치는 것 같아요. 그러면서 팽팽히 공존하겠지만요.”
민정= “그 예민함이 실은 좀 좋지 않나요?”
예은= “저 정말 단순하게 살거든요. 집에 물이 막 떨어져도 신경을 안 써요. 전구가 나가도 신경을 안 써요. 옷에 뭐가 묻어도 신경을 안 써요. 그런데 제 일에 있어서는 점점 더 예민해지는 것 같아요. 어쨌든 제가 하는 일에 대해서 저보다 더 정확하게 보는 사람이 없을 거거든요. 제가 제 디테일을 일일이 따지지 않으면 남들은 거기까지 절대로 생각 안 해준단 말이에요. 그러다 보면 누군가와 싸우게도 되지요. 네, 잘 싸우는 편이에요. 가장 기본적인 게 안 되어 있을 때 크게 화를 내요. 물론 나 자신에게 늘 가장 큰 화를 내지만요.”
민정= “2007년부터 2017년까지 원더걸스로 활동을 했어요. 그러니까 가수라는 직업인으로 산 것도 근 10년을 넘겼다는 얘기거든요.”
예은= “초등학교 때 교회에서 성탄절 특송(특별 찬송)을 하게 되어 무대에 선 적이 있는데, 그게 아마 제 인생의 첫 공연이었을 텐데, 순간 전율이 팍 하고 일더라고요. 제 몸에서 소리가 나는 그 느낌이 되게 좋더라고요. 그 ‘좋음’을 알아버리니까 어떻게든 해올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전 연습생 시절이 없었거든요. 알아서 댄스동아리와 보컬동아리에서 활동하면서 안무도 짜고 음악도 편집하고 그러다 열아홉에 오디션에 붙었어요. 돌이켜보면 롤러코스터라는 말 밖에는 안 떠올라요. 올라갔다 내려왔다 제대로 드라마를 찍었지요.”
민정= “이십 대에서 삼십 대… 그 변화를 감지하기에 좀 이르다 싶긴 하겠지만요.”
예은= “누구보다 치열했고, 주장도 강했고, 꿈만 보고 돌진한 게 저였다면 이제는 멈춰 서는 법도 배우고, 돌아서는 법도 배우고, 반드시 이래야만 한다는 원칙도 많이 줄이게 된 게 저 같아요. 20대가 비교적 비주얼적인 삶이었다면 삼십 대가 된 요즘 보면 점점 텍스트적인 삶이 되어 간다 싶어요.”
민정= “핫펠트(HA:TFELT)란 활동 명이 전부터 궁금하긴 하였어요.”
예은= “‘Heartfelt’가 진심 어린, 마음에서 우러나온, 대략 이 정도의 뜻이잖아요. 거기에 중의적으로 ‘Hot’이 담기게끔 하여 ‘핫펠트(HA:TFELT)’라 짓게 되었어요. 저는 항상 진심이 가장 중요한 사람이에요. 뭐든지 가짜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을 못 견뎌요. 처음 어디선가 이 단어를 봤는데 딱 나 같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제 안에서 머리와 심장이 항상 싸우는데 정말 중요한 문제에 있어서는 늘 심장을 따르는 편이에요.”
민정= “그렇게 뜨거운 사람들이 눈물도 참 많다지요.”
예은= “특히 책 보다가 많이 울어요. ‘딸아 외로울 때는 시를 읽으렴’이라는 책이 있어요. 거기 보면 헨리 루더포트 엘리어트라는 분이 쓴 시가 나와요. 제목이 ‘웃어버려라’인데 구절 중에 ‘사소한 비극에 사로잡히지 마. 총으로 나비를 잡지 마’라고 있어요. 총으로 나비를 잡지 말라니. 저 완전 그 구절에 꽂혀서 펑펑 울었지 뭐예요. 와 어떻게 이런 생각과 이런 표현을 하지? 언젠가 저도 그런 구절 한번 꼭 써보고 싶어요.”
민정= “노랫말이 시와 같은 혈통이니 아무래도 시집을 많이 읽으면 여러모로 도움이 되겠구나 싶어요.”
예은= “최근 들어 시를 많이 좋아하게 되었어요. 원래 소설적인 인간이었거든요. 항상 기승전결이 중요했던 사람이었는데 요즘은 변화된 저를 느껴요. 고통을 말할 때도 시의 형식으로 빗대놓으면 뭐랄까 묘한 안도가 들고 그게 곧 위로 같기도 하고요. 요즘 이해인 수녀님의 ‘서로 사랑하면 언제라도 봄’과 ‘기쁨이 열리는 창’을 번갈아 보는데요, 오래 그 여운을 간직하고 싶어서 조금씩 끊어가며 아껴 읽고 있어요.”
민정= “바쁜 와중이겠지만 종종 서점도 들르고는 하나요?”
예은= “다들 책이라는 목적이 있어서 그런지 각자 책에 빠져 계시느라 저 알아보시는 분도 거의 없어요. 요리책이나 인테리어 책 같은 건 옷 쇼핑하듯이 직접 서점에 가서 보고 사는 편인데 얼마 전에 촬영이 있어 해방촌에 있는 서점 스토리지앤북필름에 다녀왔거든요. 거기서 찰스 부코스키의 책 ‘사랑은 지옥에서 온 개’를 만나게 되었는데 제겐 운명 같더라고요.”
민정= “찰스 부코스키의 전작을 다 읽고 난 뒤 예은씨의 음악이 어떻게 변해 있을지 사뭇 궁금해지네요. 틈틈 새 작업도 하고 있는 거죠?”
예은= “요즘 ‘파랑새’에 대해 쓰고 있어요. 상징성이 있는 파랑새요. 원래 동화로 먼저 쓰려고 했던 건데 노래가 먼저 쓰이더라고요. 제가 서른, 뮤지션, 여성, 이런 키워드를 관통하는 중이잖아요. 아름답게 써보려고 해요. 기발하고 발랄하게 써보려고 해요. 우울하게는 안 쓰려고 해요. 우울함이 기본적으로 있기야 있죠. 밖으로 표현을 잘 안 하지만 혼자 있을 때는 그 끝으로 치닫고는 하죠. 그런데 글로 치유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해요. 쓰면서 제가 풍요로워지더라고요. 40대에는 저도 글이란 글을 쓸 수 있지 않을까요?”
민정= “그럼요. 진심을 다한 글이 최고의 글이라지요.”
예은= “마지막으로 이거 하나만 더요(웃음). ‘나는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은 선하다고 믿는다’라는 책인데요, 안네 프랑크의 일기를 바탕으로 쓰인 거예요. 책이란 어떤 누군가의 경험이잖아요. 이 구절이 참 와 닿더라고요. ‘자연과 햇빛, 자유, 당신 안에는 항상 아름다운 것들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모든 것들이 당신을 도와줄 거라고 믿어야 한다.’ 어때요? 좋죠?”
김민정 시인∙난다출판사 대표
※ 한국일보는 문화체육관광부 지정 ‘2018 책의 해’를 맞아 ‘책의 해’ 조직위원회와 함께 ‘무슨 책 읽어?’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김민정 시인이 각계 명사들을 만나 책에 대해 나눈 대화를 매주 금요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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