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로 접어들며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는 ‘국민 대잔치’로서의 위상을 더욱 공고히 했다.
1972년 지상파 3사의 생중계가 시작되고, 1975년 태평양화학(현 아모레 퍼시픽)이 한국일보와 공동 주최사로 나서면서 산업적 영향력까지 갖추게 됐다.
하늘을 찌를 만큼 높아진 국민적 관심은 미스코리아들이 민간 외교사절로 한국의 미를 해외에 알리는데 더 많은 힘을 실어줬다.
미스 유니버스 대회를 주름잡은 제3회 대회 ‘진’ 오현주와 제7회 대회 ‘진’ 김명자의 바톤은 오영은과 김은정이 이어받았다.
1972년 제16회 대회 ‘현’(6위에 해당) 오영은은 호주 멜버른에서 열린 미스 태평양 대회에서 3위를 차지했고, 2년뒤 제18회 대회 ‘진’ 김은정은 미스 유니버스 대회에서 전통의상상을 받았다.
1977년 제21회 대회 ‘진’ 김성희도 도미니카에서 열린 미스 유니버스 대회에 나가 전통의상상을 챙겼다.
한편, 김성희는 미스코리아가 ‘멀티 엔터테이너’로도 성장할 수 있다는 걸 처음 보여줬다.
인형처럼 완벽한 이목구비와 재치있는 말솜씨를 앞세워 1981년 당시 최고 인기 TV프로그램이었던 MBC ‘쇼2000’의 MC로 발탁됐다. 또 이듬해에는 ‘매력’이란 제목의 노래를 발표해 연말 지상파 3사의 신인가수상을 휩쓸기도 했다.
김성희가 처음 제시했던 ‘멀티 엔터테이너’로서의 성장 사례의 꽃을 피운 주인공은 1987년 제31회 대회에서 만 17세의 나이로 ‘진’에 선발됐던 장윤정이었다.
1988년 대만 타이베이에서 열린 미스 유니버스 대회에서 미스코리아 사상 최고의 해외 성적인 2위를 차지했던 장윤정은 이후 토크쇼 등 각종 예능 프로그램의 MC로 맹활약해, 지금까지도 후배들이 가장 닮고 싶어하는 선배 미스코리아로 자주 언급되고 있다.
이들 외에도 1987년 ‘선’ 최연희가 미스 월드 대회 2위에 올랐고, 1988년 제32회 ‘미’ 김희정이 미스 인터내셔널 대회에서 전통의상상을 받는 등 1980년대는 미스코리아들의 해외 미인대회 입상이 가장 활발하게 이뤄졌던 시기로 남게 됐다.
조성준 기자 when9147@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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