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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법대로 답했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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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법대로 답했던 날

입력
2018.06.05 19:00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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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이 KTX 승무원들과 코레일 간의 근로계약관계를 부정하는 판결을 선고한 날은 2015년 2월 26일이었다. 소위 KTX 여승무원 사건이다. 승무원들이 2년 내 정규직 전환 약속이 지켜지지 않자 파업을 시작한 것은 2006년, 12년 전이었다. 승무원들은 2011년 고등법원에서 승소했다. 2심까지 승소한 후, 대법원에서 4년이 흘렀다. 그리고 2015년 2월 26일, 1ㆍ2심을 번복한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2015년 3월 14일에 나는 쌍용자동차 평택공장 앞에서 열린 ‘314 희망행동’이라는 행사에 참가했다. 법률상담 부스를 차려놓고, 옆 부스의 간식을 사먹고 노동법 책을 몇 권 팔았다. 동양시멘트 조합원들이 깃발을 들고 지나가다 들러 답답함을 호소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 동양시멘트는 하청업체 노동자들에게 정규직 임금의 44%밖에 주지 않다가 이에 항의해 노조를 결성한 100여 명의 노동자들을 모두 해고했다. 지방노동위원회가 부당해고 판정을 했지만 회사는 노동자들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내고, 영업방해 등으로 고소도 했다. “지노위 결정이 났는데도 왜 해결이 안 되지요?” 그들이 떠난 후, 함께 있던 동료가 “아, 이거 오래 걸리겠는데···” 하고 침통하게 고개를 저었던 기억이 난다. 실제 이후 중앙노동위원회도 부당해고 판정을 했지만, 동양시멘트는 국가에 이행강제금을 12억원이나 내면서도 해고자들을 복직시키지 않았다. 해고자들은 회사가 제기한 몇십억 민사 손해배상소송과 형사소송에 오래 시달렸다.

동양시멘트 노동조합 다음은 KTX 승무원 노동조합 분들이었다. 보름 전 대법원 판결의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때였다. 대법원의 파기환송 판결에 재심을 청구할 방법은 없는지,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지난 4년간 받았던 인당 8,600여만원, 연봉 2,000만원 정도를 회사가 한꺼번에 전부 청구하겠다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지 물었다. 파산을 할 수 있는지 물었다. 회생절차로 천천히 갚을 수는 있는지 물었다. 가재도구에 빨간 딱지가 붙을지 물었다. 딱지를 붙이러 오는 사람들이 폭력적이지 않은지, 아이들이 놀라거나 동네에서 놀림을 받을 위험은 없는지 물었다.

나는 그 많은 질문들을 기억한다. 그리고 나의 답도 기억한다. 안타깝지만 안 돼요. 파산 어려워요. 월급 받았던 거, 최종심에서 지면 돌려줘야 하는 게 맞아요. 파산회생 신청 시에는 배우자 재산도 반영돼요. 남편분은 직업 있으세요? 그럼 어려워요. 전 재산이 전세금뿐이라도 돈이 있다면 결국 회사에 줘야 할 거예요. 네, 회사가 가압류할 수 있어요. 음, 파기환송심요, 파기환송심에서 대법원 판결이 뒤집히기는 어렵죠. 대법원 판결인데···. 회사하고 합의해 보실 수 없나요. 하다못해 이자라도 어떻게. 네, 판결금 채무는 상속돼요. 상속 포기나 한정승인, 쉽지 않아요. 7월 파기환송심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으니, 뭉쳐서 힘을 내세요.

배운 사람이 배운 대로 한 말이었다. 참 쉬운 말이었다. 그렇게 나는 법대로 말을 했다. 법대로 말을 한다고 착각했다. 수십 분 동안 사정없이, 지금에 와서 보면 다만 부당한 권력 앞에 무력한 것을 나의 지식이라 착각한 답을 했었다. 그리고 추운 날 한 자리 채웠으니 내 몫은 했다 생각하며 서울로 돌아와, 오늘은 피곤하지만 보람찬 하루였지, 하고 생각하며 잘 잤었다. 나는 그렇게 남이었다. 나는 그렇게, 그저 변호사였다.

이틀 뒤, 한 KTX 승무원이 세 살 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25층에서 투신하셨다고 들었다. 나는 법대로는 이렇고 저렇다던 내 말과, 특조단 조사조차 말로 참 쉽게 부인하는 권력과, 그에 떠밀려 추락한 목숨을, 참담한 마음으로 떠올린다.

정소연 SF소설가ㆍ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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