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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 해직 후 우리 부부에게 다가온 상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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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 해직 후 우리 부부에게 다가온 상록수

입력
2018.06.04 2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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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숙 경북과학대 사회복지과 교수의 내 인생의 히트곡

윤정숙 경북과학대학 사회복지과 교수. 김광원기자 jang750107@hankookilbo.com
윤정숙 경북과학대학 사회복지과 교수. 김광원기자 jang750107@hankookilbo.com

빨갛게 익은 사과에 반해서 대구로 왔다. 사과를 본 건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학교에서 경주로 수학여행을 갔다. 새벽 즈음, 잠시 대구역에 기차가 멈추었다. 창밖으로 사과밭이 보였다. 사과가 꽃처럼 예뻤다. 1988년, 남편(홍덕률 전 대구대 총장)이 부산과 대구를 놓고 저울질 할 때 나는 대구 쪽에 사과 하나를 놓았다. 그것이 티핑 포인트를 만들었다. 남편은 서울에서의 강사 생활을 그만두고 대구로 내려왔다.

5년이 채 지나지 않아 빨간 사과에 반해서 대구로 온 걸 후회했다. 1993년 남편이 강단에서 쫓겨났다. 교수회 총무를 맡은 게 고난의 시작이었다. 교수로서 결격 사유가 없었지만 결국 해임됐다. 얼굴이 하얗게 질릴 지경이었다. 남편이 복직을 위한 소송에 들어갔다.

역설적이게도 대구에 정이 뚝 떨어졌을 때, 대구 사람들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동료 교수 200분이 매달 1만원씩 모금을 해서 남편을 지원했다. 그 정으로 1년을 버텼다. 그 시절, 내 마음에 맴돌던 노래가 있었다.

‘저들의 푸르른 솔잎을 보라. 돌보는 사람도 하나 없는데, 비바람 맞고 눈보라 쳐도, 온누리 끝까지 맘껏 푸르다...’

‘상록수’였다. 뇌까리듯 노래를 흥얼거리면 내 마음에 푸르른 솔잎이 돋아나는 것 같았다.

1년 뒤, 노랫말처럼 됐다. 끝내 이겼다. 남편은 복직에 성공했다. 모금으로 받은 돈은 도와주신 교수님들에게 다시 돌려 드렸다.

우리 부부만의 승리가 아니었다. 한 사람의 마음에 뿌리 박힌 올곧은 신념과 그 신념을 지지하는 마음들이 모여서 일군 성과였다. 우리 부부와 교수님들의 마음속에 크고 작은 상록수가 한 그루씩 있었던 거라고 생각한다. 1년 사이에 우리 부부는 대구 사람이 다 된 느낌이 들었다.

많은 것이 바뀌었다. 해직 통고를 받았을 때만 해도 마음 약한 이야기를 자주 했다. 반은 신념, 반은 오기로 견뎠다. 1년 사이 마음이 더 굳건해졌다. 상록수의 푸른빛이 우리 마음에 가져온 평화 덕분이었다.

남편은 총장 시절에 두 가지를 올리지 않았다. 직원들 월급과 건물. 건물은 8년 동안 꼭 필요한 1채만 지어 올렸다. 월급도 올리지 않았다. 월급을 올리면 인기가 올라간다. 평도 자연스레 좋아진다. 그것이 ‘일 잘한다’는 소리를 듣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모두가 남편을 지지한 건 아니었다. 싫은 소리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남편은 일일이 찾아 다니면서 설득했다. 총장의 뜻이 아무리 좋아도 교수님들이 따라주지 않으면 성과를 낼 수 없다. 가끔 지친 얼굴을 보이긴 했지만 눈빛은 솔잎처럼 싱싱하고 푸르렀다.

언뜻 보면 세상이 오로지 이해득실에 따라 움직이는 것 같지만, 곳곳에 세파에 저항하는 상록수가 있다. 우리 부부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 푸르른 힘을 느낀다.

‘우리 가진 것 비록 적어도 손에 손 맞잡고 눈물 흘리니...’

그 푸른 기운이 세상을 조금씩 발전시키는 것이라고 믿는다.

<윤정숙 경북과학대학 사회복지과 교수 구술을 1인칭 시점으로 재구성했습니다.>

김광원기자 jang750107@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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