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석유재벌 존 폴 게티(John Paul Getty, 1892.12.15~ 1976.6.6)의 구두쇠 전설은 숱하다. 그는 셔츠가 해지면 소매만 바꿔 달아 입었고, 편지 답장을 써야 할 때면 받은 편지지의 여백에 적어 보내곤 했다고 한다. 한번은 친구들을 런던 도그쇼에 초대할 일이 있었는데, 그는 입장권 할인이 시작될 때까지 한참 동안 친구들을 끌고 행사장 주변을 서성인 뒤 들어갔다는 일화도 있다. 영국 서리주의 서턴 플레이스 저택을 구입해 보수 인테리어를 할 때는 공사 인부 등 외부인이 들락거리던 18개월 동안 전화기 다이얼에 자물쇠를 채우고 대신 공중전화를 설치하기도 했다.
그는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태어났다. 10세 무렵 보험 변호사 아버지가 오클라호마 바틀빌의 황무지 1,100에이커 광물 채굴권을 샀다가 원유가 나면서 집안은 벼락부자가 됐다. 그는 UC버클리를 거쳐 영국 옥스퍼드 모들린 칼리지에서 정치ㆍ경제학을 전공했다. 대학을 졸업하던 1914년 가을 아버지가 준 1만 달러가 그의 종잣돈이었다. 그도 그 돈을 오클라호마 유전에 투자해 큰 성공을 거뒀고, 공격적인 재투자로 부를 불려갔다. 그는 1957년 ‘포춘’ 선정 미국 최고 갑부였고, 66년 12억 달러(2017년 기준 약 90억 달러) 자산가로 기네스북에 올랐다.
73년 7월 그의 손자인 게티 3세(1956~2011)가 이탈리아 로마에서 갱단 ‘은드랑게타(Ndrangheta)’에 납치됐다. 갱단은 몸값으로 1,700만 달러를 요구했지만 게티는 손자의 자작극이라며 콧방귀를 뀌었고, 석 달 뒤 갱단이 게티 3세의 오른쪽 귀를 잘라 보낸 뒤에야 사태를 ‘진지’하게 인식했다고 한다. 그 사이 300만 달러로 줄어든 몸값을, 집요한 협상 끝에 세금공제 한도인 220만 달러로 낮춘 것도 게티였다.
게티가 아들, 즉 게티 3세의 아버지인 게티 주니어(1932~2003)의 히피 같은 삶과 손자의 반항아 기질을 못마땅해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그보단 그가 천성적으로 돈을 가족 못지않게 중시한 것도 사실인 듯하다. 그 사건이 일어나던 무렵 게티 주니어는 아버지 일을 거들고 있었다. 몸값을 빌려라도 달라는 주니어의 요구를 게티는 거절했고, 최종 협상을 주도한 뒤에야 몸값과 아들이 마련한 돈의 차액인 80만 달러를 연리 4%로 빌려주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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