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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출’하고 싶던 농촌을 ‘신의 직장’으로 바꾼 청년 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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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출’하고 싶던 농촌을 ‘신의 직장’으로 바꾼 청년 농부

입력
2018.06.04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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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 한국일보] 청년 농업인 김진환 대표. 김태헌 기자
[저작권 한국일보] 청년 농업인 김진환 대표. 김태헌 기자

※편집자 주: "10~20년 후 농민이 스포츠카 타는 시대가 올 것" 세계적인 투자가 짐 로저스가 최근 우리나라를 방문해 한 말이다. 정말로 가능한 일일까? ‘농사짓는 기자’가 대한민국의 ‘촉망받는 농업 CEO’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시골탈출’이라고 책상 앞에 써 붙여 둘 정도로 농촌을 싫어했어요. 빨리 이곳을 떠나자는 마음뿐이었죠.”

전남 장성군에 위치한 ‘백련동편백농원’ 김진환(33·사진) 대표는 어릴 적 가난한 농촌이 너무나 싫었다. 사춘기 시절 어려운 집안 형편에 준비물 살 돈조차 없어 아픔을 겪게 했고, 매년 빚이 쌓여 아끼는 차량까지 팔게 만들었던 곳이 농촌이었기 때문이다. ‘아픈’ 기억은 이곳을 떠나야 지워질 것만 같았다.

대학에서 정치외교학을 공부한 그의 목표는 너무나 단순했다. 오직 ‘시골탈출’이 전부였다. 학업을 마치고 취업을 준비하던 2010년 어느 날, 아버지의 말 한마디가 김진환 대표의 인생 방향을 완전히 바꿔 놓을 줄 그때는 몰랐다. ‘네가 취업해 나가면 일은 누가 하지?’라는 단순한 물음이 정치학도를 청년 농업인으로 변모시켰다.

“농촌에서 아무 일도 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저는 부모님과 마을 주민들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는 걸 그때 깨달았죠.”

대학을 다니면서도 취업 준비 중에도 김진환 대표는 농촌 일을 열심히 거들었던 기억이 났다. 머릿속으로는 항상 떠나고 싶은 곳이었지만, 막상 떠날 생각을 하니 마음은 복잡해졌다. 결국 그는 농촌을 선택했다. “어설프게 취업해 농촌을 벗어나는 것보다 저 같은 젊은이들이 찾아올 수 있는 농촌을 만들어 보자고 생각했어요.”

‘백련동편백농원’은 김진환 대표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함께 운영해 오다 2012년 김 대표가 경영을 이어받았다. 하지만 대외적으로 여전히 대표 직함을 사용하지는 않는다. 나이도 어리고 배워야 할 일들이 아직 많다는 생각에서다.

할머니의 병환 때문에 공기 좋은 고향으로 내려가자며 3대가 이곳을 선택한 지 어느덧 26년. 할머니는 몇 해 전 돌아가셨지만, 여전히 가족들은 ‘백련동편백농원’에서 일하고 있다. 김 대표의 남동생도 지난해 조리학과를 졸업하고 농원 식당 요리사로 일한다.

‘백련동편백농원’은 ‘나눔, 비움, 공유’라는 경영 철학을 세워 마을 주민들에게 자투리땅을 내어 주고, 마을 농산물로 식당 음식을 만든다. 운영하던 펜션도 과감히 정리해 주민들에게 손님을 양보했다.

3대가 편백농원을 운영하는 김진환 대표 가족. 김진환 제공
3대가 편백농원을 운영하는 김진환 대표 가족. 김진환 제공

할아버지는 나무를 심었고, 아버지는 나무를 가공했다. 김진환 대표는 나뭇잎 추출물과 체험, 교육 등으로 또 다른 농촌의 길을 모색 중이다. 3대가 모여 6차 산업을 이끌어 가고 있는 김 대표를 지난달 31일 장성 ‘백련동편백농원’에서 만나봤다.

- 전남 장성으로 언제 귀농했나요?

“제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막 중학교에 입학하던 1993년 이곳으로 내려왔습니다. 벌써 26년째죠. 할머니께서 편찮으셔서 공기 좋은 고향으로 내려가자며 가족이 선택한 곳이 장성입니다. 할아버지는 교육공무원을 하셨고 아버지는 건축설계회사를 운영하셨어요. 어머니도 농경제학을 전공하셨는데 모두가 일을 그만두시고 할머니를 위해 귀농을 선택하신 거죠.”

-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요.

“처음에는 모아둔 돈이 있었죠. 아버지도 몇 년만 고생하면 자리를 잡을 것으로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농촌을 너무 쉽게 본 거죠. 당장 기술이 없으니 남들처럼 고추·배추·고구마·상추 같은 매년 수확해 판매할 수 있는 작물을 선택했어요. 결과는 조금 과장을 더 하면 망했어요. 일단 저희보다 기존 농업인들 상품이 더 좋아요. 수십 년 농사를 지으신 분들을 귀농한 저희가 따라잡을 수가 없는 건 당연했어요. 상품이 좋지 않으니 가격도 제대로 받지 못했죠. 그렇게 7년의 세월이 흐르고 할머니께서 돌아가셨어요. 할머니 건강 때문에 귀농했는데 먹고 살기까지 힘들게 된 거죠. 다시 도시로 올라가자고 의견이 모였어요. 저희는 서울에 살다 전주를 거쳐 장성으로 내려왔거든요. 그런데 다시 그곳들로 가려니 이미 도시의 집값은 저희 전 재산을 팔아도 살 수가 없는 수준으로 올랐더라고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곳에 남게 된 거죠.”

[저작권 한국일보] 김진환 대표가 농원을 찾은 방문객들과 편백 숲을 걷고 있다. 김태헌 기자
[저작권 한국일보] 김진환 대표가 농원을 찾은 방문객들과 편백 숲을 걷고 있다. 김태헌 기자

- 생활은 더 어려워졌겠는데요?

“중·고등학생 때 집안이 어려우니 그게 큰 상처가 됐어요. 돈이 없어서 집에 있는 차까지 팔아야 했으니까요. 제 책상 위에는 항상 ‘시골탈출’이라고 써 붙여 둘 정도였거든요. 어떻게 해서든 빨리 이곳을 떠나고 싶었어요. 마을 주민들의 텃세도 심했고요. 지역 주민과의 갈등, 고소·고발, 힘든 노동에 매년 억 단위의 빚까지 생기는 이곳이 너무나 싫었죠.”

- 농촌은 텃세가 심하죠.

“처음에는 너무 힘들었죠. 할아버지께서 생물학을 전공하셨지만, 저희 집안에서 농사를 직접 지어본 사람은 없어요. 농사 방법을 마을 주민들에게 물어봐도 잘 안 가르쳐 주셨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안 가르쳐 줬다기보다 대화하는 방식이 서로 서툴렀고, 저희도 그걸 알아채지 못해 오해한 거라고 생각해요. 도시로 다시 갈 수 있는 형편은 안되고 그렇다고 농사를 안 할 수는 없으니 무작정 그렇게 빚으로 7년을 버틴 거예요.”

- 편백은 어떻게 선택했나요?

“지금은 편백의 피톤치드가 많이 알려졌지만 당시만 해도 저희조차 그 성분을 몰랐어요. 편백이 뭔지도 몰랐죠. 주변에 워낙 이 나무가 많다 보니 비가 오면 나무에서 향긋한 냄새가 났어요.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저 나무에서는 원래 저런 향이 난다’는 말만 할 뿐 잘 몰라요. 편백은 땔감으로도 못 쓴다고 하더라고요. 실제 나무에 불을 붙여봤는데 정말 불이 안 붙어요. 참 희한한 나무라 생각만 했죠. 그런데 할아버지가 그게 편백이고 피톤치드라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 말을 듣고 아버지가 고민하셨죠. ‘이걸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그때는 정말 먹고 살기 어려우니 뭐라도 팔아서 돈을 벌어야 했어요. 마을 주민들 모두 ‘저 친구들 먹고 살기가 어려우니 정신이 나갔다’고 할 정도로 편백으로 여러 시도를 했죠. 나무는 수십 년이 되어야 크니까 당장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어요. 그런데 나뭇잎은 많잖아요. 일단 이걸 따다 차처럼 끓여봤어요. 먹어보니 맛도 좋고 향도 괜찮더라고요. 그때부터 축령산 등산로 앞에서 나뭇잎 끓인 물을 팔기 시작했죠. 등산하시는 분들이 드셔보고 입 소문이 나면서 아, 이 나무로 뭔가 하면 되겠다고 생각하고 편백을 주변에 심기 시작했죠.

마을 주민들의 농산물로 만든 '시골밥상'. 김진환 제공
마을 주민들의 농산물로 만든 '시골밥상'. 김진환 제공

- 농원에 편백으로 만든 상품이 많더라고요.

“편백으로 상품을 만들 정도로 키우려면 보통 40년은 되어야 해요. 사람이 80살까지 산다고 하면 일생 딱 2번 나무를 베어낼 수 있는 거죠. 그만큼 나무를 직접 키워 무엇을 만들기는 어렵고 공급도 따라가지 못해요. 물론 저희가 심은 나무도 지금은 작아서 무엇을 만들지는 못해요. 나뭇잎 채취만 하고 있어요. 농원에 있는 상품들은 편백을 외부에서 구입해 아버지와 마을 주민들이 직접 깎아 만든 상품이에요.”

- 텃세가 있던 마을 주민들을 채용했군요.

“저희가 편백농원을 시작하면서 농원 앞 자투리땅을 주민들에게 내놨어요. 축령산 입구여서 주말이면 유동인구가 많아요. 할아버지와 아버지께서 주민들이 30~40분씩 시내로 나가 물건 파는 게 힘들어 보이니 이곳에 농산물 좌판을 열어 주자고 하셨어요. 천막은 물론이고 전기요금도 모두 무료로 대여해주고 있어요. 지금은 총 17곳으로 늘었는데 주민들 모두 좋아하세요. 가을 성수기에는 한 달에 400만 원 이상의 수입을 올리는 농가도 있어요.”

- 비용을 받지 않는 이유가 있나요?

“마을 분들에게 정말 1원도 받지 않아요. 다만 이곳에서 판매하는 물건은 가장 좋은 제품으로 팔아 달라고 부탁해요. 하급 상품을 팔면 다른 분들에게도 피해가 갈 수 있으니까요. 그 외에는 상생하자는 의미에서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내어 드리고 있어요. 저희가 소유한 산의 자투리땅 중 일부는 아프신 분들의 텃밭으로 내드렸어요. 피톤치드가 나오는 숲에서 작물을 심으며 힐링과 운동을 할 수 있게 해드리자는 취지였죠. 환우분들이 심고 싶은 작물을 말씀하시면 저희가 모종을 심어 드리고 있어요. 당연히 모든 건 무료죠. 저희 집안의 철학이 ‘나눔, 비움, 공유’인데 이런 면에서 자투리땅을 공유한 거에요.”

[저작권 한국일보] 김진환 대표의 자투리 땅에 채소들이 심겨져 있다. 김태헌 기자
[저작권 한국일보] 김진환 대표의 자투리 땅에 채소들이 심겨져 있다. 김태헌 기자

- 나눔과 비움은 무엇인가요?

“저희는 식당도 운영해요. 이곳에서 사용하는 농산물은 모두 마을 주민들이 생산한 것이에요. 주민들 판로를 넓혀주고 저희는 좋은 상품을 저렴한 가격에 소비자에 제공할 수 있어 좋아요. 작년에만 2만 명 가량의 소비자가 우리 식당을 이용했어요. 가격도 10년째 6,000원을 받고 있죠. 모든 게 마을 주민과 협업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어요. 저희도 귀농 초기에는 소득을 높이고자 펜션도 운영했는데 항상 방이 꽉 찼죠. 등산로 입구에 위치하다 보니 등산객들은 주로 저희 펜션을 이용했어요. 거기다 식당도 있어 선택을 많이 받았죠. 한 해 4,000만 원 정도의 수입을 올렸어요. 반면에 마을 주민들 펜션은 방이 남기 시작했고요. 그래서 우리는 펜션이 주업이 아니니 손님을 마을 분들에게 보내드리자 하고 펜션을 닫았어요. 지금은 사무실로 이용해요. 펜션 손님을 보내드리니 주민들은 우리 식당을 소개해주시더라고요. 또 환우분들이 마을 펜션에서 장기 투숙을 하시기도 하고 주말에 가족들이 오면 또 그분들이 펜션을 이용하세요. 저희가 나눈 작은 마음이 마을 구성원 소득을 함께 올려주고 있는 거죠.”

- 농원에 근무하는 인원은 얼마나 되나요?

“농장 정규직 직원은 7명이고, 교육이나 식당, 나무 가공 등을 위해 일하는 파트타임 직원은 30명 정도 있어요. 농촌 특성상 주말이나 교육이 잡혔을 때 농사일을 하시다 와서 일하시고 다시 돌아가세요. 저희는 특히 젊은 주민들을 최대한 채용하려 해요. 젊은이들이 없어 못 하고 있지만요(웃음). 저처럼 젊은 사람들이 농촌에서 일하면 발전할 수 있다는 걸 체험했기 때문이죠. 마을 사람들에게 연 최대 300만 원의 교육비도 지원하고 있어요. 지원을 받았다고 저희와 관련된 일을 하라고 요구하지도 않아요. 다만 농촌과 관련된 교육을 받으면 추후 농촌 일을 할 수 있게 될 것이고, 저희 농장이 업무에 맞는다면 농장에서도 일 할 수 있겠죠. 농촌 관련 인력을 늘리자는 의미죠.”

[저작권 한국일보] 청년 농업인 김진환 대표의 '백련동편백농원' 모습. 김태헌 기자
[저작권 한국일보] 청년 농업인 김진환 대표의 '백련동편백농원' 모습. 김태헌 기자

- 농원 주 수입원은 판매인가요?

“나무를 가공한 제품들로는 도마, 목침, 수저 등이 있어요. 모두 140여 종인데 피톤치드가 무엇인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을 때 시작한 것이에요. 필요한 물건들을 이용해 보게 하려고 다양한 제품을 만들어 봤어요. 가공품인 치약과 가글, 비누 등은 제가 아이디어를 내 대학연구팀과 함께 만들었죠. 편백에서 피톤치드라는 게 나온다는데 이걸 일상용품으로 만들어 보자 하고 제안했고 그 결과물이에요. 3차 가공품은 나무를 직접 베어내거나 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오래 갈 수 있는 장점이 있고 저희가 가진 나무의 잎을 활용하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내다볼 수 있는 장점이 있죠.”

- 상품 판매 외 소득원은요?

“대추나무를 이용한 체험도 하고 있어요. 처음에는 어른들을 대상으로 체험과 구매를 연결하자는 생각이었는데 지금은 아이들만 받고 있어요. 어른들은 욕심이 많으셔서 몰래 대추를 가져가거나 심지어 나무를 베어가기도 하는 걸 보고 충격을 받아서였죠. 아이들은 정말 예쁜 대추 몇 개만 가져가요. 나무를 상하게 하지도 않고요. 아빠, 엄마 대추라면서 3~4개만 가져가는데 욕심이 하나도 없어요. 어른보다 아이들을 교육하는 것이 더 보람차겠다 싶어 아이들 교육에 집중하고 있죠. 올해부터는 마을 학교를 열어 제가 학교장을 맡고 있어요. 숲 체험과 초·중·고생 농업인 멘토, 생산과 요리법도 강의해요. 요리는 제 동생이 조리학과를 졸업하고 식당과 함께 맡아 주고 있어요.”

- 사회적 기업이라는 느낌이 드네요.

“저희가 하는 모든 일의 가장 큰 목표는 돈이 아니에요. 지금까지 정부 지원도 받지 않았어요. 하고 싶은 일, 잘할 수 있는 일, 다 함께 잘 사는 길을 찾을 뿐인데도 지난해 저희 농장에 방문해 물건을 사거나 식사를 하신 분들이 4만 7,000명이에요. 돈을 쓰지 않고 교육만 받거나 체험만 하신 분들까지 더하면 훨씬 많죠. 욕심을 냈다면 이루지 못했을 일이라 앞으로도 상생할 수 있는 사업을 할 생각이에요.”

장성=김태헌 기자 119@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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