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전쟁이 한창이던 1347년, 프랑스 칼레 시를 점령한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3세는 1년 동안의 결사항전에 대한 보복으로 시민을 학살하는 대신 대표자 여섯 명의 목숨을 요구했다. 이에 여섯 명의 지도층 인사가 시민을 대신하여 죽겠다고 나섰고, 이들의 희생정신에 감명 받은 에드워드 3세는 대표자 여섯 명은 물론 전체 시민을 살려주었다.
이 미담은 오늘날까지 전해지며 ‘사회 지도층에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를 뜻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어원이자 유럽정신의 정수로 일컬어진다. 하지만 이는 비단 유럽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우리나라도 순국, 혹은 위국헌신 등의 말들이 칭송받듯이, 이를 실천한 여러 애국자들이 있다. 이러한 분들을 기억하고 그 정신을 기리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자신보다 대한민국을 더 사랑했던 분들의 이야기를 소개해 본다.
유사 이래 1,000여 회의 외침에도 반만년 민족사의 명맥을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자신보다 국가를 우선시했던 애국자들의 활약 덕분이었다. 구한말 조국의 운명이 경각에 이르자 위국헌신의 전통은 어김없이 살아났다. 13도창의군 참모장으로 순국하신 왕산 허위 선생은 3,000 두락의 전답을 의병운동에 쾌척한 명문가 출신이다. 러시아 관내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경비를 대준 최재형 선생, 만주 독립운동의 산실인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를 건립한 이회영 선생 또한 막대한 가산과 그 자신의 목숨을 독립운동에 바쳤다.
이렇듯 광복을 이룩한 독립운동가들의 숭고한 정신은 6ㆍ25전쟁이라는 새로운 국난을 맞이하여 다시 발휘되었다. 전쟁 발발 하루 만에 선두 전차를 파괴하여 적의 진로를 막고 전사한 김풍익 중령은 29세의 청년 장교였다. 세 아들을 6ㆍ25전쟁 등으로 조국에 바치고도 수만 평의 임야를 개간하여 상이군경의 터전을 마련해 준 조보배 여사가 남긴 '국가가 있어야 자식도 있다'는 말에는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이 그대로 담겨 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말할 때,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한국 이름 ‘서위렴 2세’로도 유명한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는 평양에서 선교사로 활동한 서위렴 1세의 아들로 태어나, 하버드대에서 박사과정 중 6ㆍ25전쟁 소식을 듣고, 제2의 조국인 한국을 돕겠다며 참전하여 서울수복작전에서 전사했다. 공군으로 자원하여 6ㆍ25전쟁 임무수행 중 실종된 아들의 수색작전을 중단하라고 명령한 미8군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의 일화 또한 유명하다.
이분들 외에도 조국독립과 국가수호를 위해 신명을 바친 국가유공자들과,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외국인들은 모두 자신보다 대한민국을 더 사랑한 애국자였다. 비록 이분들 모두가 사전적 의미의 ‘노블레스(Noblesse)’ 즉 귀족의 신분은 아니다.
하지만 이 분들이 쟁취 혹은 수호해낸 독립과 호국, 그리고 자유와 평화라는 인류 공통의 가치는 다른 어떤 것 보다 소중하다. 그리고 이러한 가치들을 실현하고자 어떠한 희생도 마다하지 않았던 이 분들의 정신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다고 할 만하다. 위기에 처한 조국과 고통 받는 겨레를 구하고자 이분들이 행했던 헌신은 칼레의 여섯 시민과 상응하거나, 오히려 그 이상으로 칭송받아 마땅하다.
오진영 서울지방보훈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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