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체국에 가면 잃어버린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 그곳에서 발견한 내 사랑이 풀잎 되어 젖어있는 비애를…’(이수익 시 ‘우울한 샹송’ 중에서)
그이만큼 절절한 건 아니더라도 우체국에 들어서다 잠시 애상에 젖을 때가 있다. 계약서를 등기로 발송할 때, 새 책이 나와 해외 저자에게 보내는 책 박스를 들고 도착한 뒤 번호표에 적힌 내 차례가 오기 전 부랴부랴 영문 주소를 적어 내려가다, 어떤 얼굴과 때를 놓쳐 버린 편지가 떠올라 화들짝 놀라는 것이다.
오래 전에 해외 펜팔이란 걸 했다. 1981년, 중학교 2학년이었다. 당시 여자 중고생들이 즐겨 보던 ‘여학생’이라는 잡지에서 해외 펜팔을 알선했다. 원하는 나라와 사람의 성별, 나이 등을 잡지에 딸려 온 엽서에 적어 보내면 엇비슷한 대상들끼리 짝지어 주는 방식이었다. 그나마 익숙한 나라는 고모와 사촌언니가 사는 미국뿐이었다. 대상자의 성별을 두고 오래 고민했다. 그 무렵 주말의 영화에 단단히 빠져 있던 나는 ‘에덴의 동쪽’ 제임스 딘 같은 청년이거나 ‘윌튼네 사람들’ 속 맏아들처럼 착한 이성 친구를 간절히 원했다, 애석하게도 용기가 조금 부족했다. 며칠을 망설이다 내 또래 여자아이를 원한다고 적어 보냈다. 며칠 후 대상자의 주소와 사진을 동봉한 편지가 배달됐다. 미시간주에 사는 모리 그레솔. 교정기 낀 치아가 두드러지는 열세 살 소녀였다.
그에게 꿀리지 않는 편지를 쓰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모른다. 미리 필기체까지 연습했던 나는 사전을 넘겨 가며 고르고 고른 단어를 조합해 쓴 편지를 영어 선생님께 검수받은 후 파랑과 빨강 사선으로 테두리를 두른 국제우편용 봉투에 넣어 보냈다. 보름쯤 지나고 답장이 왔다. 우체부 아저씨가 전해 준 편지는 작고 노란 봉투였다. 초등학생처럼 커다란 글씨로 쓴 주소가 손바닥만한 봉투를 거의 다 채우고 있었다. 아, 이런 봉투에 이런 글씨로도 다른 나라 사람에게 편지를 보낼 수 있는 거구나.
그 후 일년 남짓, 모리와 나는 수십 통의 편지를 주고받았다. 오대호로 수학여행을 갔던 이야기며, 크리스마스트리에 쓸 나무를 캐기 위해 하루 종일 산을 누빈 일, 오빠랑 다녀온 유니버설 스튜디오 기념품 등을 챙겨 보내는 모리의 편지는 점점 길어졌고, 영문편지 쓰는 일이 버겁던 나의 편지는 점점 짧아졌지만. 그러다가 내가 고등학교에 들어가고 고향집을 떠나면서 모리의 편지를 제때 수신하기 어려워졌다. 한두 번 답장이 없자 그녀는 내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한국의 우편체계로 인해 편지가 주인을 잘못 찾은 건 아닌지 걱정하는 글을 썼다. 우리나라 우체국을 못미더워하는 듯한 내용에 자존심이 발동한 나는 한껏 무게 잡은 편지를 써서 부쳤다. 아니라고, 나는 지금 공부를 위해 고향을 떠나 있고 매우 바쁘니, 몇 년 후 대학 들어가서 여유가 생기면 내가 먼저 연락을 하겠다고. 모리는 알았다고, 잊지 말고 편지를 달라는 답장을 보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나는 늘 바빴고, 모리는 우체국에서 영문주소를 쓸 때 잠시 떠오르는 얼굴이었다. 그러면서도 등기우편이든 소포든, 습관처럼 받는 이의 주소를 봉투에 손으로 적어 넣는 내게 우체국 직원이 인터넷우체국 가입을 권했다. 시키는 대로 가입절차를 마치자 이메일이 왔다. 기념우표 발매 안내 메일링이었다. 매듭과 침선, 채상, 자수로 이뤄진 전통공예 우표세트를 보는 순간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모리가 골라 붙였던 봉투의 그 예쁜 우표들. 행여 찢길세라 살금살금 떼어 모아 두었던 앨범은 먼지를 뒤집어쓴 채 고향집 창고에 처박혀 있을 것이다. 늦기 전에 예쁜 기념우표를 일부러라도 붙여 편지를 써야지. 날은 여름으로 치닫는데 모처럼 마음이 할랑해진 나는 윤도현의 ‘가을 우체국 앞에서’를 흥얼거린다.
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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