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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평생 이름도 못 썼는데 이젠 작가 소리 듣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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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평생 이름도 못 썼는데 이젠 작가 소리 듣네요”

입력
2018.06.04 04:40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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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시립그림도서관 한글교실서

가족ㆍ이웃에 대한 이야기 등 소재

할머니 20명이 그림일기 만들어

지난 3월 서울서 전시회 열고

내년에는 에세이집 출간 예정

지난 3월 8일부터 17일까지 서울 종로구 지하문로 갤러리 ‘우물’에서 열린 ‘그려보니 솔찬히 좋구만’ 작품전시회를 찾은 할머니들이 김중석(맨 오른쪽) 그림책작가와 김순자(앞줄 왼쪽 세 번째) 한글작문교실 선생님과 단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순천시 제공
지난 3월 8일부터 17일까지 서울 종로구 지하문로 갤러리 ‘우물’에서 열린 ‘그려보니 솔찬히 좋구만’ 작품전시회를 찾은 할머니들이 김중석(맨 오른쪽) 그림책작가와 김순자(앞줄 왼쪽 세 번째) 한글작문교실 선생님과 단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순천시 제공

“팔십 평생 넘도록 내 이름조차 읽지 못한 까막눈이가 글을 깨우쳐 책을 만들고 전시에 출판까지 하게 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어.” 전남 순천시가 운영한 한글작문교실에서 처음 글을 배운 하순자(81) 할머니는 “주위에서 나보고 작가 선생이라 했던 말이 떠올라 웃음이 절로 나온다”고 말했다.

80대 늦깎이 학생들이 한글과 그림을 배워 꿈과 인생을 담은 그림에세이를 출간한다. 주인공은 순천시립그림도서관이 지난해 4월 12주 과정으로 개설한 한글작문교실 초등반 ‘내인생 그림일기 만들기’ 프로그램에 참가한 할머니 20명이다. 김중석 그림책작가에게 기초를 배운 할머니들은 자신의 인생을 그림일기로 표현한 생애 첫 그림책을 출간하게 됐다.

시어머니나 친정어머니에게 구박받았던 일화나 오랜 세월 함께 해온 남편과 이웃에 대한 이야기 등을 소재로 했다. 지난 세월은 한 장의 그림 속에 고스란히 담겼고 몸은 할머니가 됐지만 그림과 글에는 소녀의 감성이 묻어났다.

권정자(87) 할머니는 ‘이웃에 야박했던 일’이라는 제목의 그림에세이에서 “가난하게 살던 이웃 아주머니가 우리 집에서 쌀 열 되를 사갔는데 쌀 되박을 야박하게 밀었던 기억을 떠올리면 당시 형편이 어렵고 쌀이 귀했던 시절이라고 하지만 내 마음까지 가난했던가 하는 생각이 들어 부끄러웠습니다. 야박하게 했던 것도 후회스럽습니다. 지금 이웃 아주머니를 만날 수 있다면 되밀이로 깎아낸 쌀의 열배, 백배를 더 퍼주고 싶은 마음”이라며 젊은 시절 이웃과의 일화를 소개하고 따뜻한 마음을 전했다.

송영순(70) 할머니는 ‘이룰 수 없는 꿈’ 제목의 글에서 “시골에서 어렵게 살다 보니 꿈이 뭔지도 몰랐습니다. 학교 갈 형편이 못 돼 내 또래 애들이 학교가면 부러웠습니다. 언젠가 돈 때문에 재판을 한 적이 있었는데 글을 몰라 어려움을 겪어 변호사가 되고 싶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룰 수 없는 꿈이었습니다. 지금은 꽃과 나무를 키우고 이웃과 오손도손 살아가는 게 꿈입니다”라고 썼다.

순천한글작문교실 초등반 학생들에게는 그 동안 평생 잊지 못할 일들이 있었다. 그림 한 번 그려본 적 없었던 어르신들이 그림 수업을 받고 각자 한 권의 그림책을 낸데 이어 지난 3월에는 서울에서 전시회를 열어 전국에 팬을 만들었다. 서울 전시회를 본 10여개의 출판사에서 제의가 들어왔고 이중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주로 다룬 ‘남해의 봄날’ 출판사와 뜻이 맞아 책을 내기로 했다.

순천시는 ‘남해의 봄날’과 1일 정식 출판계약을 체결했다. ‘우리 할머니–그려보니 솔찬히 좋구만’(가제) 이라고 제목을 정했다. 어르신들이 유명세를 타면서 단체이름도 지었다. 나이는 살짝 많지만 아직 열정이 가득한 순천 소녀들의 제2의 전성기를 응원하는 의미에서 ‘순천소녀시대’로 했다. 순천한글작문교실 어르신들의 그림에세이는 내년 2월쯤 만나 볼 수 있으며 출판과 동시에 출판기념회와 전국 순회전시도 계획하고 있다.

나옥현 순천시립그림도서관장은 “교육에 참여하신 어르신들의 연령대가 다양하지만 배움에 대한 열정은 모두 뜨거웠고 할머니들이 글을 알면서 자존감과 자신감을 얻었다”며 “그림에세이에는 할머니들의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이 묻어나고 짧은 글이지만 굴곡진 인생과 삶을 엿볼 수 있어 가족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이 모두 좋아한다”고 말했다.

순천=하태민 기자 hamo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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