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14년 아칸소에서 태어나
오빠들과 공치기하던 시골소녀
35년 연상 복싱 챔피언 출신인
조 지네트와 19세 때 뉴욕행
# 1942년부터 7년간 택시 운전
전시 인력난에 여자도 채용
성ㆍ인종 차별 분위기 속
남자들과 경쟁서 밀리지 않아
# 1979년 극단 'H.A.D.L.E.Y' 설립
1949년 뮤지컬 배우로 데뷔 후
98세 은퇴 하기까지 배우 겸 연출
가난한 흑인 예술인의 '마더' 로
자동차의 역사와 함께 기억되는 몇 명의 여성이 있다. 앞 유리 와이퍼를 개발해 1903년 특허를 딴 메리 앤더슨(Mary Anderson, 1866~1953), 방향지시등과 브레이크등을 고안한 무성 영화배우 플로렌스 로렌스(Florence Lawrence, 1886~1938). 1909년 여름 피아트 크라이슬러사의 전신인 맥스웰 사의 소형 승용차(runabout)로 뉴욕서 샌프란시스코까지 3,800마일(약 6,100km)을 59일 동안 내달린 앨리스 렘지(Alice, H Ramsey, 1886~1983)도 있다. 어머니와 단 둘이서, 강도나 선주민 인디언을 맞닥뜨릴 위험을 무릅쓰며 포장 안 된 흙길 자갈길을 지도도 없이 달리는 동안 그는 11차례 타이어를 갈았고 브레이크 페달 등을 교체하고 잔 고장을 수리해야 했다.
윌마 러시(Wilma R. Russey)는 미국 최초의 여성 택시기사로 유명하다. 뉴욕의 한 택시회사(Dalton’s Garage) 정비공이던 그는 1915년 1월 1일 회사 택시를 몰고 뉴욕 브로드웨이에 등장했다. 표범가죽 모자와 숄을 두르고 밤색 스커트에 검은 가죽장갑을 끼고 나선 그는 시민들의 시선을 사로잡았고, 그냥 여자가 모는 택시니까 타보겠다는 이들로 큰 인기를 누렸다고 한다. ‘여성 택시 기사 브로드웨이를 침략하다’란 자극적인 제목을 단 당시 뉴욕타임스는 러시가 “새해를 맞아 택시 운전을 해보고 싶었다. (…) 2, 3주 해본 뒤 계속할지 판단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썼다. 그는 “모두들 내게 친절했고, 내가 만난 다른 택시 기사들도 다들 나를 도와주려고 했다”고 말했다. 러시가 얼마나 택시 기사로 일했는지는 알려진 바 없다.
하지만 본격적인 미국 첫 여성 택시 기사는 42년 뉴욕서 영업을 시작한 거트루드 지네트(Gertrude Jeannette)라 해야 한다. 그의 영업 환경은 러시 때와는 사뭇 달랐다. 그가 택시를 몰고 맨해튼 파크에비뉴 월도프 에스토리아 호텔 앞에 나타나자 먼저 손님을 기다리던 기사들이 진입을 방해했다. “이봐 친구, 당신은 여기 차 대면 안 돼.” 지네트는 흑인이었고, 흑인 택시는 할렘 같은 업타운에서만 영업해야 한다는 불문율이 있었다. 못 들은 척 모자를 눌러 쓴 채 택시 안에서 버티던 그는 손님이 타자마자 “막아선 다른 택시의 펜더를 내 차로 밀어 길을 연 뒤” 부리나케 출발했고, 그제서야 누군가가 자신의 등 뒤에 대고 “여자다! 여자 기사야!”라고 외치더라는 이야기를, 그는 2011년 할렘의 ‘듀이 문화센터 Dwyer Cultural Center’ 초청행사에서 말했다.(nyt, 2018.4.26)
그 행사는 사실 택시기사 체험담을 듣자고 마련된 건 아니었다. 지네트는 흑인 최초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탄 시드니 푸아티에(Sidney Poitier, 1927~) 등과 함께 ‘아메리칸 니그로 시어터 American Negro Theater’에서 40년대 연기를 시작한 배우로, 또 79년부터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극단 ‘H.A.D.L.E.Y’의 설립자 겸 배우ㆍ연출가로 더 유명했다. 그는 할렘 흑인 무대예술의 역량을 믿고 예술인 양성 및 공연 보급의 보루를 지켜온 ‘할렘 르네상스’의 마지막 계승자였다. 할렘의 ‘마더(Mother) 거트루드’라 불리던 거트루드 지네트가 4월 4일 별세했다. 향년 103세.
러시와 지네트의 경험이 달랐던 건 단지 피부색 탓만은 아니었다. 19세기 중반 이른바 도금시대(Gilded Age)를 거치며 독점자본주의의 기틀을 다진 미국 경제는 세기말 유럽발 장기불황(1873~1896)으로 잠시 주춤했지만 20세기 들면서 급성장했다. 이민자들의 값싼 노동력과 철강 석탄 등 풍부한 자원은 포디즘ㆍ테일러리즘으로 상징되는 기업혁신과 맞물려 경제적 자신감을 북돋우며 가난한 이민자들을 아메리칸 드림으로 들뜨게 했다. 인종 및 빈부의 계층ㆍ계급적 차별과 격차는 당연히 극심했으나 아직 조직적 갈등으로 분출되지는 않았다. 지네트가 택시를 몰던 1940년대 상황은 사뭇 달랐다. 우선 물자 부족으로 허덕이던 전시였고, 30년대 대공황의 악몽이 거치지 않은 때였다. 전시 특수로 공장은 붐볐지만, 서민 경제에 온기를 주기에는 너무 일렀다. 택시들이 늘어나면서 대도시의 경우 영업 경쟁이 치열했고, 생활전선에서 흑인과 경쟁해야 하는 서민 백인들의 차별의식도 악화했다. 그리고, 그 사이 뉴욕 시민들은 1920년대 ‘할렘 르네상스’라는 흑인들의 드센 문화운동과 그들의 활력을 경험했다. 1차대전 전후 호황과 소비주의, 참전 등을 통해 달라진 사회적 위상 위에서 흑인들은 할렘을 무대로 재즈와 문학 등 억눌린 예술적 열정을 분출했고, 할렘 르네상스의 문화적 열기는 인종적 각성과 자존감으로, 정치ㆍ경제ㆍ사회운동으로 파급됐다. 흑인진보연합의 약진과 뉴 니그로 운동, 마커스 가비의 흑인분리 독립주의(Garveyism)가 대표적인 움직임이었다. 대공황을 거치며 분위기가 더 거칠어졌다. 50번가 할렘의 지네트가 다운타운 파크에비뉴에서 마주했던 백인 경쟁자들의 시선이 대충 그러했다.
거트루드 지네트는 1914년 11월 28일 아칸소 주 어바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농사를 지으며 오클라호마 스피로(Spiro) 인근 인디언보호구역서 교사로 일했고, 어머니는 주부이자 농부였다. 일가는 대공황기 아칸소 리틀락으로 이주했고, 지네트는 교실 한 칸짜리 흑인학교 던바(Dunbar)고교를 졸업했다. 유년 시절 그는 얌전히 집에서 엄마 일을 돕기보다 5남2녀 형제들 중 오빠들과 어울려 나무 타고 공치기하고 연어낚시를 즐기던 아이였다고 한다. 고교시절 매일 ‘Lift Every Voice and Sing’란 노래를 교가처럼 부르며 하루 수업을 시작하던 기억이 난다고 그는 말했다.(nty, 위 기사) “목청껏 노래하라, 자유의 하모니로 하늘과 땅이 울리도록”이란 노랫말로 시작하는, 흑인들의 국가(國歌)로 꼽히던 노래였다.
지네트가 고교 무도회 날 35년 연상의 프로복서 조 지네트(Joe Jeannette, 1879~1958)를 만나, 그와 함께 뉴욕으로 달아난 건 19살이던 1933년이었다. 지네트는 연애 이야기를 시시콜콜 공개한 적 없지만, 흑인 프로복싱 헤비급 챔피언 출신 미국 동부의 사업가 조는 작은 시골 소녀인 자기를 무등 태워 자유의 세계로 데려다 줄 거인 같았을지 모른다.
조는 전설의 복서였다. 뉴저지에서 태어나 거리의 싸움꾼으로 성장한 조는 1904년 프로복서로 데뷔, 1919년 은퇴할 때까지 165전 113승 22패(63 KO승)를 기록한 ‘세계 흑인 프로복싱 헤비급 챔피언 World Colored Heavyweight Championship’으로, 프로복싱 역사상 가장 긴 대전으로 기록된 1909년 4월 17일 샘 맥베이(Sam McVey, 1884~1929)와의 경기의 승자였다. 설욕전 형식으로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그 경기는 한 명이 링에 뻗을 때까지 무제한 라운드로 치러졌다. 장장 49라운드 3시간 15분 동안 시합은 이어졌고, 조는 27차례 샘은 19차례 링에 쓰러지고 일어섰다. 맥베이는 50라운드 시작 종이 울렸지만 코너의 의자에서 일어서지 못했다. 그 전설적 경기로 조는 흑인 복싱의 영웅이 됐고, 조와 맥베이는 각각 1997년과 99년 세계 프로복싱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조 지네트는 23년 흑인 최초로 뉴욕 주 복싱협회 공식 심판으로 활동했고, 이듬해 뉴저지에 권투도장을 차려 49년까지 운영했다. 도장을 접고 리무진 렌탈업을 시작했다가 ‘애들레이드(Adelaide)라는 이름의 택시회사로 바꿔 경영했다. 애들레이드는, 그를 소개한 여러 복싱 사이트와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그의 아내로 둘이 이혼했다는 기록은 없다. 거트루드 지네트는 그의 혼외 부인이었던 듯하다. 그리고 지네트가 몬 택시도 조의 회사 택시는 아니었고, 사정은 알 수 없지만 지네트는 스스로 돈을 벌어야 했다.
42년은 전시 인력난으로 뉴욕의 택시회사들이 여성 채용공고를 낸 첫 해였다. 그는 49년까지 7년간, 전장의 남자들이 복귀한 뒤로도 택시를 몰았다. 그는 남자들과 경쟁해서 밀리지 않는 기사였다.
지네트가 뉴욕살이를 시작할 당시 조는 ‘할렘 더스터(Harlem Dusters)’라는 모터사이클 클럽 회장이기도 했다. 왕년의 클럽 ‘허드슨 더스터(1890~1917)’와는 달리 노골적인 도시 갱단은 아니었지만, 할렘 더스터는 거친 남자들의 세계였다. 지네트는 거기서 모터사이클을 익혀 뉴욕 최초로 모터사이클 면허를 땄다. 시드니 푸아티에가 스타로 뜨기 전, 가장 유명했던 흑인 배우 겸 가수이자 좌파 인권운동가였던 폴 롭슨(Paul Robeson, 1898~1976)의 1949년 뉴욕 픽스킬(Peekskill) 공연 당시 조는 롭슨의 보디가드였다. KKK 등 백인 인종주의자들이 시작한 난동(peekskill riot)으로 공연은 무산됐고, 거트루드와 조의 모터클럽 회원들이 롭슨을 피신시켰다는 일화도 있다.
말더듬이 심했던 거트루드는 발성교육을 받기 위해 49년 ‘아메리칸 니그로 시어터’에 들어갔다. 그는 택시 외에 다른 생계수단을 마련하기 위해 부기학원을 다녔고, 어쩌든 언어 장애를 극복해야 했다. 수강과정 중 연기과정이 있었고, 푸아티에 외에 루비 디(Ruby Dee) 오시 데이비스(Ossie Davis) 등과 연기를 배웠다. 그리고 브로드웨이에서 200회 넘게 공연한 1949년의 뮤지컬 ‘Lost in the Stars’로 데뷔했다.
하지만 연기 이력은 그가 50년대 적색공포 시대의 예술인 블랙리스트에 오르면서 중단됐다. 연기를 못하게 되자 그는 희곡을 썼다. 무대에서 진짜 흑인이 연기해야 할 캐릭터가 등장하는 작품이 거의 없어서 직접 희곡을 썼다고 그는 95년 인터뷰에서 말했다. 마음에 드는 여성 이야기도 드물었다고 한다. “강한 여성, 누가 연기해도 전혀 부끄럽지 않을 여성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남부 소작농 아이의 생활을 소재로 한 자전적 첫 희곡 ‘This Way Forward’, 1930,40년대 브롱크스의 흑인 여성 인력시장(Bronx Slave Market)을 소재로 한 ‘A Bolt From the Blue’ 등 그는 5편의 희곡을 썼다. 60년 브로드웨이와 오프브로드웨이로 복귀한 그는, 비록 큰 이름을 얻지는 못했지만 다수의 연극과 뮤지컬, 몇 편의 영화와 TV쇼 등에 출연했다. 그리고 79년 할렘에 극단 ‘H.A.D.L.E.Y’를 설립했다. ‘Harlem Artist’s Development League Especially for You’의 머릿글자를 딴 ‘해들리’는 결혼 전 그의 성이기도 했다. 가난과 범죄의 상징처럼 불리던 할렘이 도시가 팽창하면서 풍경과 이미지가 바뀌어 오는 동안, 지네트의 해들리는 가난한 흑인 예술인이 도약할 수 있는 발판으로, 할렘 르네상스의 계승자이자 마지막까지 남은 할렘의 흑인 극장으로 자리를 지켜왔다. 지네트는 연기와 연출, 무대감독을 병행하며 80대가 되도록 연기를 계속했다. 그가 극장 감독직에서 공식 은퇴한 것은 98세 되던 2012년이었다. 해들리의 전 예술감독 워드 닉슨(Ward Nixon)은 “지네트는 여러 차례 할리우드 진출 기회가 있었지만 늘 할렘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할렘을 지키며 할렘이 일류 극장을 가질 수 있도록 하려고 애썼다”고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말했다. 2011년 극장 기금마련 행사에 참석한 그는 “할렘에 얼마나 많은 인재가 숨어 있는지 여러분은 아마 모를 것이다. 헬렘은 재능의 보고이다”라며 “우리는 계속해야 하고, 내게 그것보다 중요한 건 없다”고 말했다.(nydailynews.com)
그는 뉴욕 흑인예술의 살아 있는 전설로 불리며 ‘폴 롭슨 어워드’ 등 수없이 많은 상을 탔다. 말년에는 ‘Ms J’ ‘Ms G’라 불렸다고 한다. 조와의 사이에 낳은 딸은 다섯 살에 숨졌고, 이후 내도록 독신으로 살았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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