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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무 칼럼] 주먹밥과 헌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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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무 칼럼] 주먹밥과 헌혈

입력
2018.05.31 10:24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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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ㆍ18광주민주화운동이 38년을 넘겼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했으니 강산이 변해도 네 번 가까운 세월이다. 이렇게 긴 시간이 흘렀건만, 그때의 진실과 진상이 제대로 밝혀지지 못해, 진실과는 전혀 다른 엉뚱한 이야기들이 인터넷에 떠돌면서 광주의 한복판에 서서 운동의 자초지종을 충실히 목격했던 나 같은 사람을 참으로 화나게 하던 일들이 하나 둘이 아니다. 나뿐만 아니라 5ㆍ18관련자 모두와 당시의 80만 광주시민 모두가 분노를 금하지 못하게 하고 있으니, 이제는 더 이상 침묵만을 유지하기 어렵게 되었다.

“북한군이 내려와 일으킨 폭동이다”라는 전혀 사실이 아닌 내용이 지금도 떠돌고 있다. “시민군들이 먼저 총을 쏘자 계엄군은 자위권으로 발포하게 되었다”는 내용도 계속 떠도는 말인데, 전혀 가당치 않은 이야기다. 시민들에게 무슨 총이 있었다고 군인에게 총을 쏠 수 있겠는가. 총을 맞고 죽어가는 시민들을 목격하고, 총에 꽂은 대검으로 시민을 찌르고, 총대로 두들겨 패는 참상에 분노한 시민들이 군인들에게서 죽음을 무릅쓰고 총을 빼앗아, 대항하기 시작한 일이 시민들이 총을 들게 된 과정이었음을 우리가 눈으로 똑똑히 목격한 사실이다. 시민들이 자위권을 발동해 총을 들게 되었음이 그래서 사실인 것이다.

“사전 계획된 세력의 중심이 좌경 빨갱이들이었다”라는 터무니없는 내용도 성립될 수 없는 말이다. 포악한 계엄군의 학살에 맞서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대학생들의 시위가 확대되어 온 시민이 참가하는 시민항쟁으로 번졌는데, 사전 계획이 어떻게 가능한 일이겠는가. 항쟁의 진행과정에서 행여라도 ‘불순세력’이나 ‘불온분자’가 있다면 시민 항쟁은 그 참뜻이 훼손될 수밖에 없다고 여기면서 시위참가자나 시민군들은 수상한 행동이나 모습을 나타낸 사람의 색출에 혈안이 되어 있었는데, 북한군이 내려와 일으킨 폭동이라는 말이 가당키나 한 일이겠는가.

80년 당시의 모든 어용 언론들은 광주에서 시민들의 폭동과 난동이 일어났다고 대서특필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폭동이고 난동이었는데, 은행이나 금융기관은 말할 것 없고 도로에 즐비한 금은방 하나 털린 곳이 없고, 어떤 약탈이나 절도 행위도 없었는데 그런 것이 가능한 일이겠는가. 총칼로 양민을 학살해서 집권야욕을 채우려는 신군부 반란군들의 정체를 정확히 파악한 광주시민들의 생각은 정말로 정확했다. 신군부의 정치군인들은 모든 것을 숨겼지만, 그 당시 시민들이 외쳤던 구호나 내걸었던 플래카드의 문구에는 민심이 정확히 반영되어 있었다. 가장 상징적인 구호이자 내걸었던 문구는 “살인마 전두환을 찢어 죽이자”라는 말이었으니, 그 당시나 지금이나 그 이상의 진실은 있을 수가 없다. 그런 구호에 5ㆍ18광주민주화운동의 진실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대통령이 엄연히 존재하고 국방부장관이나 계엄사령관이 지휘체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왜 그런 직책의 인물들에게는 화살이 가지 않고 겉으로는 전혀 나타나지 않았던 ‘전두환’이란 이름이 최고의 타깃이 되었겠는가. 그렇게 진실은 숨길 수가 없는 것이다. 대통령도 국방부장관도, 계엄사령관도 실질적인 권력은 행사하지 못하는 존재였고, 보안사령관과 중앙정보부장 서리의 직책에 있던 ‘전두환’이라는 사람이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당시의 권력 판세를 정확히 꿰뚫어 보았던 광주시민들의 지혜가 놀라울 뿐이다. 이래서 ‘민심이 천심이다’라는 속담에 진리가 있음을 알게 된다. 하늘만이 알고 있던 것을 백성들이 알아냈으니 무서운 사실이 아닌가.

각설하고 떠도는 이야기가 사실일 수 없다는 명백한 증거를 이제라도 밝혀본다. 북한의 군대가 내려와 일으킨 폭동이라면, 행여라도 시민군들이 밥을 먹지 못해 싸울 힘이 약해질까 봐 집집에서 나온 아낙네들이 주먹밥을 만들어 시민군들에게 나눠줄 수 있겠는가. 거리마다, 골목마다에 주먹밥을 먹여주던 아주머니들의 마음은 민심이고 천심이었다. 주먹밥이야말로 옳고 바른 일을 하는 사람이 시민군이었음을 만천하에 증명해 준 일이었다. ‘불순세력’, ‘불온분자’는 전혀 없이 순수한 시민군이었음이 거기서 증명된다.

유혈이 낭자한 시민들이 들것에 실려 병원으로 밀려들자 저장된 피가 부족해 시민들에게 헌혈을 요구하자,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팔을 걷어붙이고 시민들이 병원으로 몰려와 헌혈에 응해주었다. 의리에 분노하고 공분(公憤)에 불이 붙자, 자신의 건강은 생각하지 않고 옳은 일하다가 부상당한 시민들을 살려내자는 생각이 먼저였으니, 이런 정신이 어디서 나왔겠는가.

주먹밥으로 함께 살아가자는 공생(共生)의 정신, 헌혈을 통해 부상자를 먼저 살려내자는 이웃사랑 정신, 불의에 저항해 정의를 세우자는 의리 정신, 이런 모든 것이 합쳐져 광주의 5·18대동정신이 꽃피울 수 있었다. 폭동을 일으킨 폭도들에게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주먹밥을 나눠주고 헌혈까지 할 수 있었겠는가. 이 사실만으로도 광주정신을 왜곡하는 말들은 모두 거짓임을 명백히 증명해준다.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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