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오랜 만이죠? 이렇게 인터뷰하는 것도 진짜 어색하네요.”
무섭게 내리는 비를 뚫고 최근 서울 서초구의 한 카페에서 김보민(40) KBS 아나운서를 만났다. 어느덧 초등학생을 둔 학부모가 됐다며 멋쩍어하는 그는 이내 “복귀 앞두고 10㎏ 감량했어요. 무조건 다이어트했죠, 뭐. 하하하”라며 환한 미소를 보였다. 지난 3년 간 한국을 떠나 일본에서 공부를 한 김 아나운서는 자신의 근황을 차분한 목소리로 전했다.
“나를 바꾼 3년의 유학생활”
“1년은 육아휴직, 2년은 석사(학위) 공부했어요.” 2015년 3월. 김 아나운서는 남편 김남일 선수(현 축구국가대표팀 코치)를 따라 일본 교토로 날아갔다. 아들 서우가 1년에 한 달 정도만 집에 머무는 아빠를 “너무 그리워해서”다. “가정이 먼저”라는 생각에 남편과 의논을 했다. 회사를 그만 두는 얘기까지 나왔다. 하지만 그녀는 남편에게 “내 의지가 아닌데 그만두면 당신을 원망하게 될 것 같다”는 솔직한 심정을 전했다.
KBS에서 1년의 육아휴직을 받았다. 그는 “교토에서의 1년은 꿈만 같았다”고 했다. 남편도 없이 일과 육아를 전담했던 지난 10년의 무게가 만만치 않았다. 그것을 훌훌 털어버리고 온 가족이 모인 것 자체가 “행복”이었다. 매일 아빠를 찾던 아이의 얼굴이 날로 밝아졌다. 회사에 얽매여 있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자유를 만끽했다. 자연을 벗삼아 아이와 자전거로 이동하고, 쉬는 날이면 가족 나들이를 즐겼다. 한국에 있었다면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일본 생활 1년 되던 날. 소속 구단에서 은퇴한 남편은 중국으로 간다고 했다. 김 아나운서는 또 한번 선택의 기로에 섰다. 그녀는 아이와 함께 일본에 남아 대학원에 진학했다. 2년간 고베에 있는 한 대학교에서 정치교육미디어를 공부했다. “살아가야 했으므로” 일본어는 필수였다. 학생과 엄마 역할을 2년간 지속했다. 이국에서 1인2역을 하며 더 단단해졌다. 유학 중에도 ‘워킹맘’의 내공은 숨길 수 없었나 보다.
“그곳에서 인생을 많이 다듬고 왔어요. 저도 모르게 성숙해진 것 같다고 할까요? 복귀하니까 마음가짐이 달라지던데요. 이제 저 자신을 위해 더 절실해졌어요. 직장(KBS)이 제 인생에서 얼마나 소중한 지 깨달았으니까요.”
“아나운서실 중고참, 그러나 한계 느낄 때 많아”
김 아나운서는 내달부터 방송되는 KBS1 ‘행복한 지도’에 출연할 예정이다. 대한민국 방방곡곡을 여행하면서 지역 소개를 해주는 프로그램이다. 여행을 좋아하고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걸 즐기는 그에겐 안성맞춤인 듯 보인다. 오랜만에 밀려오는 설렘에 제작진에게 “누워도 되죠?”라며 농담 섞인 의욕 발언도 서슴지 않는 요즘이다. 그는 “정해진 것 없이 리얼하게 촬영하기 때문에 저만의 색깔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다”고 했다.
새로운 포부로 방송할 생각에 벅차지만 한편으론 마음 한 쪽이 아프기도 하단다. 3년 휴직을 끝내고 아나운서실에 돌아와보니 어느새 “중고참”이 돼버렸지만, “후배들을 이끌어 줄 만한 위치인가를 되짚어보게” 된다. 김 아나운서는 건강하고 밝은 이미지로 젊은 시청층에 어필하는 방송인이었다. 스스로도 “KBS1 ‘도전! 골든벨’과 KBS2 ‘뮤직뱅크’, KBS라디오 ‘키스 더 라디오’를 진행하면서 10~20대 시청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했다. 소위 ‘잘 나갈 때’는 뒤돌아보지 못했다. 후배들까지 챙길만한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해가 바뀔수록 생각도 변했다. 그는 “요즘 후배들은 모두 방송 잘하는데 기회가 별로 없다”며 안타까워했다.
“예전에 했던 예능 프로그램 ‘상상플러스’는 제작진과 출연 아나운서가 같이 고민하면서 만들어갔던 방송이었어요. 하지만 요새는 아나운서들이 출연할 만한 프로그램조차 없다는 게 문제예요. 여전히 제작국이나 보도국에서 불러주기만을 기다리는 입장이거든요.”
그래서일까. 프리랜서를 선언하고 퇴사하는 동료들이 늘었다. 공채 29기인 김 아나운서도 11명이던 동기가 현재는 4명만 남아있다. “후배들에게 모범이 되고 영향을 미치는 선배가 되고 싶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후배들은 계속 들어오는데 능력을 발휘할 기회가 적다는 건 슬픈 현실이에요. 그래서 더 책임감을 느껴요. ‘정통파 아나운서’의 길을 가고 싶어요. 험난할 지라도 공영방송 아나운서들이 가야 할 길인 듯해요.”
궁금해졌다. 프리랜서 방송인의 계획이 전무한 것인지. 그는 단호했다. “저는 절대 KBS를 퇴사하지 않을 겁니다(웃음). 계속 KBS에 남아서 좋은 방송 만들고 싶어요. 그게 제 인생의 목표예요.”
“남편은 내 스승, 스포츠는 내 삶”
김 아나운서는 아직도 “왜 김남일 선수와 결혼했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고 했다. 대답은 간단했다. “말이 잘 통해서. 그리고 나와 반대여서” 운동선수에 대한 선입견은 대게 말이 없다거나, 무뚝뚝하거나, 완벽주의자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하지만 김 아나운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는 남편을 “존경한다”며 “눈물도 많고 따뜻한 사람”이라고 전했다. 김 아나운서는 “남편은 사내에서 선후배들 간의 관계가 중요하다고 늘 상기시켜준다”고 했다. 그는 “남편은 입력만 되고 출력이 안 되는 사람”이라고도 했다.
두 가지 일화를 들려줬다. 김 코치는 연애를 할 때도 후배들을 불러 밥을 사주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축구용품을 후배들에게 선물하는 일도 많아 “매일 싸웠다”고도 했다. 김 코치는 “무명시절에 챙겨주고 고민을 함께 해준 선배들의 정을 후배들에게 주는 것뿐”이라며 당시 여자친구인 김 아나운서를 달랬단다. “그래야 그 후배들이 선배가 됐을 때 내리사랑을 실천할 수 있고, 넓게는 축구계가 발전할 수 있다”는 말을 덧붙이며. 싸움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김 아나운서는 또 남편이 국가대표팀 선발에서 경쟁하게 될 몇몇 인기 축구스타들을 불러 밥이나 술을 사주는 모습에 “(저들이) 얄밉지 않느냐”며 투정도 부렸다. 김 코치는 “대중은 계속 스타가 나와야 그 종목(분야)에 관심을 갖게 된다. 저 친구들이 있다는 건 너무도 고마운 일”이라고 했다.
“정말 맞는 말이었어요. KBS도 아나운서실에 스타가 있으면 대중의 관심을 더 받게 되고, 아나운서실의 역할도 더 커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남편은 정말 현자예요.”
축구선수 출신 남편을 둔 덕에 김 아나운서도 ‘축구인’이 다 됐다. 스스럼없이 “스포츠가 내 삶”이고 말할 정도다. 내달 열리는 러시아월드컵을 그 누구보다 기대하고 긴장하며 기다리고 있다. 그러면서 꿈이 하나 생겼다. “아나운서로서 월드컵 등 스포츠 관련 일을 하고 싶어요.” 하지만 축구와 야구 경기 해설이나 중계는 남자 아나운서들의 전유물이다. 편견을 깨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 “남편이 지도자로 활동하면서 함께 축구 경기를 정말 많이 봤어요. 축구를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할 정도니까요. 기회가 올지는 모르겠어요. 다만 KBS가 외부 인력을 쓰는데 치중하지 말고 내부에도 기회를 줬으면 합니다.”
강은영 기자 kis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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