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권 쥔 대법원장 심기에 함몰
과잉충성하다 삼권분립마저 위협
대법원도 우수한 판사 차출 관행
‘승진 잘되는 엘리트 코스’ 심화
“인원 줄이고 장기근무 폐단 개선을”
사법 수뇌부 심기를 건드리는 판사의 뒷조사에 더해 청와대와의 협상 카드로 판결을 만진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 사법수장이 밀었던 숙원사업(상고법원) 해결을 위해 사법부 안에서 재판ㆍ법관 독립의 헌법 가치를 훼손한 법원행정처의 근본적 수술 요구에 한층 힘이 실리게 됐다.
재판 지원이 목적인 대법원 산하 기구인 법원행정처가 대법원장 의중대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면서 법원 내홍과 사법 불신을 낳은 건 어제 오늘 일은 아니다. 인사권과 예산 배당, 사법행정 권한을 죄다 틀어쥐면서 전국 법관 2,990여명에게 직간접적 통제 기능을 발휘했다. 일견 대법원장 ‘충성맨’이던 임종헌 전 행정처 차장이 판사 본분을 망각하고 삼권 분립을 위협할 발상이 담긴 문서 작성을 지시한 것으로 보이지만, 대법원장 직속 부대인 행정처 차원의 조직적인 문제로 보는 법관들이 상당수다.
과거 대법원장들이 행정처를 직속 기관이자 엘리트 코스로 다져 논 탓이 크다. 실제로 근무평정이 우수한 자원만 쏙쏙 차출했다. 행정처에 근무했던 고위 법관은 “행정 업무보다 재판이 중요한데 수뇌부는 행정처를 더 중시했다”고 말했다. 그는 “똑똑한 판사만 추리니 그들의 고등부장 승진은 당연했던 거고, 재판 판사들은 대법원장 눈에 드는 자만 ‘잘 나간다’고 불만을 품으면서도 내심 행정처 발령을 기대했다”고 덧붙였다. 몇몇 행정처 출신 전현직 고위 법관은 행정처에 판사를 37, 38명씩 대거 기용할 필요가 없다고 짚었다. 그들간의 경쟁도 치열해 구두로 해도 될 간단한 업무도 ‘긍정ㆍ부정 측면’을 다 따지는 등 과도한 보고서를 내곤 했다고 한다. 이번에 공개된 판결별 대법원 입지 분석 문건이 대표적인 사례다. 한 고등부장 판사는 “행정처 판사를 절반(현재 34명)으로 줄여도 큰 지장 없다”고 말했다.
대법원도 ‘행정처 판사 키우기’ 관행을 인정했다.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특별조사단은 최근 보고서에서 ‘행정처 출신 법관의 고등부장 승진, 행정처 차장의 대법관 제청 인사 패턴이 점점 강화됐다’고 밝혔다. 이로 인해 행정처 판사들이 대법원장 인사권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업무에 함몰되는 ‘관료’ 성향이 강해졌다는 것이다. 판사 관료화가 심해지며 사법 수뇌부의 재판 독립성 위협도 커졌다. 양승태 체제 행정처가 긴급조치 발동과 관련한 배상 불인정 대법원 판례를 깬 판사 징계를 검토한 정황도 이번에 드러났다. 법원 학술모임 국제인권법연구회가 지난해 판사 500여명 설문결과, 사법행정 정책 반대로 인사 불이익을 짐작하는 판사가 88%나 됐다.
행정처에 연속 4년 7개월 동안 몸담은 임 전 차장 사례처럼 장기 근무 폐단을 없애고, 보직 순환 규칙을 둬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 법원 판사는 “재판을 오래 떠나 있으니 상명하복의 행정처 문화에 젖어서 다른 부서 판사나 재판부로 돌아간 판사에게까지 무리한 문건 작성을 시킨 것”이라 말했다. 행정처에 다양한 가치관과 성향의 인적 구성이 이뤄지지 않은 점도 문제였다는 비판도 나온다. 한 판사는 “법무부와 대검찰청 등 서울권 요직에만 근무를 하지 못하도록 하는 최근 검찰 쪽 개선안처럼 ‘붙박이’ 행정처 인사를 없애야 한다”고 강조했다.
무엇보다 대법원장 힘을 대폭 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대법원 산하 사법발전위원회의 한 위원은 “자문기구인 행정위원회(가칭)를 둬 대법원장의 사법행정 추진 방향 타당성이 대법관 회의 전에 검토되도록 하는 등 견제ㆍ감시하는 안이 논의되고 있다”고 전했다. 행정업무를 법무부로 넘기거나 독립성이 보장되는 사법평의회를 두고 행정처를 없애는 게 해법이란 일선 법관 의견도 더러 있다.
대법원 스스로도 “대법원장에게 집중된 사법행정권을 감시ㆍ견제할 수단이 없어 사법행정의 자의적 행사나 남용을 방지하기 어렵다”고 보는 만큼, 김명수 대법원장이 향후 얼마나 권한을 내려놓는 대책을 밝힐지 주목된다.
손현성 기자 hsh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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