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서 음성 분석 기술의 최고권위자로 꼽히는 숭실대 소리공학연구소장 배명진 교수에 대한 의혹을 방송(지난 22일)한 MBC 시사프로그램 ‘PD수첩’의 서정문 PD는 처음 제보를 받았을 때만 해도 망설였다. 25년간 방송과 신문 등 언론에 7,000여번 얼굴을 내밀며 ‘소리 전문가’로 명성을 쌓아온 배 교수의 분석 자료가 과학적이지 않다는 제보였다. 자칫 한 개인을 향한 비방으로 비춰질까 우려했다. 최근 서울 상암동 MBC에서 만난 서 PD는 “몇 번이고 심사숙고 했다”고 말했다.
“가장 큰 고민이 바로 그 부분이었어요. 엄청나게 부담이 됐죠. 그래서 중간에 한 번 엎고 방송하지 않으려고 했었죠. 하지만 마음을 고쳐먹은 건 이 분(배 교수)의 코멘트가 법정이나 방송에서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었습니다. 어쩌면 나중에 비슷한 일이 벌어졌을 때 또 한 사람의 인생이나 여론의 흐름이 잘못된 방향으로 바뀔 수도 있잖아요. 알면서 방치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어요.”
조심스럽고 힘든 취재가 이어졌다. 30여명의 전문가를 찾아나선 것도 배 교수 개인이 아닌 “세상에 나온 과학적 결과물”에 대한 교차검증이 필요해서였다. 서 PD는 “개인의 도덕적인 문제를 쫓는 게 아니라 음성 분석이 과학적이지 않다는 대목에 집중”했다. 한 개인을 ‘저격’하는 식으로 접근하지 않으려 했다. 소리와 음성 등을 분석한 그의 결과물에만 파고들었다. 전문가들을 직접 만나고 전화통화를 하며, 이메일을 주고 받으면서 확신이 들었다. 배 교수의 소리나 음성 분석이 과학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연이어 나왔다.
‘PD수첩’은 2012년 제주도에서 발견된 한 군인의 시체와 관련된 사건, 고 성완종 경남기업 회장이 남긴 마지막 음성 파일, 인기 아이돌그룹의 욕설 의혹 파일 등 사회적으로 이슈가 된 큰 사안들에 배 교수의 음성 분석 결과가 활용됐다고 방송했다. 서 PD는 “검찰에서도 어떤 사건이 있을 때 배 교수한테 의뢰하는 경우도 있고, 법원에도 그의 감정서가 활용되기도 했다”며 “분명 민사 사건에서도 배 교수를 찾을 수 있을 텐데, 더 이상 모른 채 지나갈 수 없었다”고 강조했다.
배 교수에 대한 방송이 나간 뒤 뜻밖의 반응도 있었다. SBS 시사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를 견제하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였다. 배 교수가 ‘그것이 알고 싶다’에 종종 출연해 얼굴을 알렸기 때문이다. 서 PD는 “그런 말을 들었지만 전혀 아니다. 배 교수는 ‘PD수첩’에도 출연한 적이 있다”고 했다.
“개인적으로 ‘그것이 알고 싶다’에 애정이 많습니다. 지난 9년 간 ‘PD수첩’이 제 역할을 못했을 때 ‘그것이 알고 싶다’가 어려움 속에서도 많은 일들을 해냈잖아요.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순실씨의 국정농단을 낱낱이 방송했고, 세월호 참사 이야기도 많이 다뤘고요. ‘그것이 알고 싶다’ PD들에 대한 존경심도 있습니다. 동종업계 사람으로서 힘들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죠.”
지난 2월과 3월 방송된 ‘MB형제와 포스코’ 2부작도 파장이 컸다. 방송 이후 권오준 포스코 회장이 돌연 사퇴 의사를 밝히면서 ‘PD수첩’이 제기한 의혹 때문이 아니겠느냐는 얘기들이 돌았다. ‘PD수첩’은 포스코가 이명박 정부 시절 자원외교에 동원됐다는 의혹을 방송했다. 2011년 포스코가 100억원대로 추정됐던 에콰도르의 기업 산토스CMI를 800억원대로 인수하고, 500억원 이상을 들여 인수한 영국 소재 기업 EPC에쿼티스가 유령회사로 추정된다는 내용이었다. 이 과정에서 서 PD는 권 회장을 직접 만나고 에콰도르와 아르헨티나까지 날아가 현지 상황을 보도했다.
“저희가 처음 의구심을 품은 건 포스코의 재무제표였어요.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많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구나’ 싶었죠. 재무제표 속에 답이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방송을 해야 한다는 확신이 들더라고요.”
서 PD는 포스코 관련 취재가 두 달 이상 걸렸다고 했다. 배 교수를 다룬 방송도 한 달의 취재 기간을 거쳤다. 그러면서 취재기를 기록하는 버릇도 생겼다. 최소 한 달 정도가 걸리는 취재 기간은 ‘PD수첩’ 제작진에겐 보물 같은 시간이다. 서 PD도 ‘PD수첩’ 선배들이 했던 것처럼 취재가 끝나면 그 과정을 소상히 적으려고 노력한다. “취재과정을 통해 느낀 고통 혹은 즐거움이 다른 취재를 할 때 도움”이 되기도 한다. 현재 ‘PD수첩’의 진행자이자 선배인 한학수 PD가 저술한 책 ‘진실, 그것을 믿었다’의 도움이 컸다. 한 PD가 황우석 박사의 줄기세포 조작 논란 취재기를 담은 책이었다. 서 PD는 “한학수 선배가 한 번 읽어보라고 주신 책이었는데, 나중에 읽어보니 어떤 무협지보다 재미있었다”며 “매일 기록하며 취재하던 그 꼼꼼함이 빚어낸 결과였다”고 했다.
지난해 12월 방송을 재개한 ‘PD수첩’은 좀더 단단해졌다. 예전의 명성을 되찾아가는 느낌이다. 지난해 7월 아이템 검열을 이유로 ‘PD수첩’ 제작 거부에 나섰던 서 PD도 요즘 변화된 분위기를 감지하고 있단다. 당시 ‘PD수첩’의 제작 거부는 공정방송을 되찾자는 파업의 도화선이 됐다.
서 PD는 “섭외를 하면서 ‘PD수첩’에 대한 달라진 위상을 느낀다”고 했다. “그 누군가는 카메라 앞에 앉아 인터뷰를 할 때 예상할 수 없는 손해 및 피해 등을 걸고 나오는 겁니다. 그 프로그램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죠. 하지만 예전에는 ‘아예 출연하지 않겠다’는 분들이 많아 자괴감을 느낀 게 사실입니다. 지금은 ‘PD수첩’ 아니면 하지 않겠다는 분들도 있어서 신뢰를 되찾은 기분입니다.”
강은영 기자 kis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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