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 원한다” 신속한 담화 이어
중재역 문 대통령에 회담 제안
며칠간 원산 → 평양 → 판문점
600㎞ 오가며 회담 불씨 살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두 번째 만남은 한 달 전 남북 정상회담보다 훨씬 전격적이었다. 불과 하루 만에 조율이 끝났다. 이게 가능했던 건 남북 정상의 의지와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지만, 북미 정상회담이 더 절실했던 김 위원장 사정 덕분일 공산이 크다. 김 위원장 입장에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신속히 소통하는 데에 문 대통령만큼 확실한 메신저가 없었으리라는 분석이다.
정황들을 보면 김 위원장은 다급했다. 그를 그렇게 만든 건 6ㆍ12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을 취소한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서한이었다. 24일 밤 편지를 받은 김 위원장은 채 9시간도 지나기 전인 25일 오전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을 시켜 “회담을 하고 싶다”는 뜻을 담화 형태로 표명했다. 27일 문 대통령 발표에 따르면 김 위원장은 그리고 그날 오후 문 대통령에게 ‘일체의 형식 없이’ 만나고 싶다는 뜻을 전해왔고, 이튿날(26일) 곧바로 회담이 열렸다.
트럼프 대통령의 회담 취소 선언 뒤 김 위원장이 보인 일련의 행보는 파격적이다. 김 제1부상 명의로 낸 ‘화해 담화’ 발표는 전례 없이 빨랐다. 또 체면을 세우느라 ‘강 대 강’ 식 초강수를 불사했던 과거와 달리 절제된 표현으로 자세를 낮추면서 트럼프 대통령을 치켜세우는 일도 마다치 않았다.
어떻게든 북미 정상회담을 성사시키겠다는 김 위원장의 의지는 세간의 추측보다 더 견고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날 북한 관영 조선중앙통신은 전날 정상회담에서 김 위원장이 “역사적인 조미 수뇌회담(북미 정상회담)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피력하셨다”고 보도했다. 대내적으로는 내달 12일 북미 정상회담 개최 사실을 처음 공개했다.
단기에 장거리를 이동하는 일도 김 위원장은 감내했다. 북한 매체에 공개된 동선을 보면 김 위원장은 23일 즈음해 강원도 원산에 머무르다가 25일 오후 평양으로, 26일 평양에서 판문점으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최근 며칠 동안 그가 내달린 거리는 600㎞에 육박한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통일전략연구실장은 “김 위원장의 유연하고 빠른 대응은 그가 북미 정상회담 개최를 얼마나 중시하고 있는지 보여준다”고 했다.
이렇게 김 위원장이 전격과 파격, 분주를 감수한 건 무엇보다 궤도를 이탈한 북미 간 거래를 제자리로 돌려놓기 위해 최대한 신속히 비핵화 의지를 트럼프 대통령에게 전달하려는 의도였으리라는 게 전문가들 관측이다. 홍민 통일연구원 연구위원은 “신속하게 북미 회담 날짜를 재확정하는 데 김 위원장이 남측을 영민하고 실용적으로 잘 활용했다”며 “올 들어 채택한 ‘경제 건설 총력’ 노선의 성과를 9ㆍ9절(북한 정권수립기념일)까지 가시화하기 위해 먼저 풀어야 할 북미관계 해결 단초가 사라질 절체절명 위기에서 김 위원장이 남북관계를 지렛대 삼아 기사회생한 셈”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김 위원장이 얼마 전 워싱턴에서 한미 정상회담을 하고 온 문 대통령에게서 구체적인 트럼프 대통령 의중을 듣는 한편 문 대통령에게 조언도 구하고 싶었을 거라는 추측도 나온다. 김용현 동국대 교수는 “남측을 통해 비핵화 의지를 더 확실히 밝히는 것뿐 아니라 문 대통령으로부터 북미 정상회담 및 비핵화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입장을 직접 듣는 것도 김 위원장이 바란 일이었을 것”이라고 했다.
권경성 기자 ficcione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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