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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당연한 것이 그리운 세상

입력
2018.05.25 19:00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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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가 되고자 하면서도 부자를 증오하는 모순적 태도를 지닌 우리에게, 고 구본무 LG그룹 회장은 멋진 부자의 모습을 보여 주며 순간이나마 부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지워 주었다. 고인의 소탈하고 겸손했던 언행이 SNS를 통해 회자되면서 구본무 신드롬까지 생겨 났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장례가 치러지는 사흘 동안, SNS에는 고인을 언급한 글이 3만여건에 달했다. 말단 직원에게도 존댓말을 썼던 회장, 수행원 없이 개인적 용무를 보던 회장, 그를 마주했던 이들은 그를 따뜻하고 정 많은 옆집 할아버지, 작은 약속도 소중히 여기는 기업인으로 기억한다. 장례도 그의 유언대로 간소한 가족장으로 치러졌고 유해는 화장되어 나무에 뿌려졌다.

가진 자들의 탐욕과 갑질이 사회의 화두가 되면서 언제부터인가 부의 축적은 사회악 처럼 여겨졌다. 선거에 나서는 후보들은 앞다퉈 재산을 축소 신고하고 개인 빚을 마치 훈장처럼 여기고 자랑한다. 대부분의 부는 부적절한 관행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믿음과 가진 자들은 축적된 부를 통해 법과 질서 위에 군림한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사회현상이다. 반세기 동안의 압축성장 과정에서 결과가 과정을 포장하고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 왜곡된 문화가 만들어 낸 현실이다. 이런 현실 속에서 접한 구 회장의 일화는 우리에게 감동을 선물했다.

고인의 언행이 그의 사후에 일부 미화된 측면도 없지 않을 것이다. 어찌 보면 그의 언행이 그리 특별할 것도 없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사회 구성원으로서, 기업 경영인으로서 당연한 삶을 살아온 것 뿐이다. 당연한 것이 드물고, 그래서 당연한 것이 그리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이기에 구 회장에게 마음을 빼앗겨 버린 지도 모른다. 당연한 것은 당연하게 여겨지고 당연한 것은 당연하게 지켜져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불확실성 속에서 불안감을 느끼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예측이 불가능한 관계와 상황은 우리를 힘들게 한다.

4차 산업혁명이 진행되면 제품과 서비스, 노동력은 최소한의 기능을 구현해 내는 단위인 모듈로 쪼개져서 제공되고, 사용자들은 모듈들을 선택하고 조합하여 그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는데 최적화된 제품과 서비스, 노동력을 사용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모듈들은 뭉치고 흩어지면서 다양한 형태로 시장에 존재하는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켜 갈 것이다. 그 과정에서 시장 주체들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다양한 관계 속에서 살아가야 할 것이며 다양한 상황에 놓이게 될 것이다.

파편화하고 다양화하는 사회에서 구성원 간의 소통과 협업을 위한 최소한의 약속이 당연하게 여겨지고 지켜지지 않으면, 우리는 수많은 갈등을 경험하며 그 갈등으로부터 자신을 지켜 내기 위해 거칠어지거나 주변에 벽을 쌓고 스스로를 고립시켜 갈 것이다. 건널목에 파란불이 켜지면 지나가던 차들은 멈추어 서야 한다. 그리고 보행자는 건널목에 빨간불이 켜지면 파란불이 켜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이러한 당연한 약속이 지켜지지 않으면 운전자도 보행자도 긴장과 두려움 속에 건널목을 지나가야 할 것이다.

우리의 삶 속에서 지금껏 무시하고 지나쳤던 당연함을 작은 것부터 실천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좁은 길에서 누군가를 마주하면 우측으로 서로 피해 가고, 버스를 타면 안쪽 자리부터 채워 앉고, 운전 중에 길을 건너는 보행자와 마주하면 잠시 멈추어 기다려 주고, 비행기를 타면 좌석을 나누어 놓은 팔걸이에 팔을 올리지 말고 팔걸이 안쪽에 팔을 두고, 대중탕에 가면 사용한 수건과 때밀이 수건은 수거함에 집어 넣고 머문 자리에 남겨진 비누거품은 샤워기로 한 번 씻어 내자. 삶 속에서 이런 작은 약속들이 지켜지고 당연한 것이 당연히 지켜지는 문화가 만들어 질 때 또 다른 구본무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박희준 연세대 산업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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