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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 살해된 여대생… “내가 범인” 옆집 청년의 이상한 자백

입력
2018.05.27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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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내가 죽이지 않았어”

※ 편집자 주 : ‘일본 미제사건 갤러리’는 일본의 유명 미제 사건을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당신을 살인 용의자로 긴급 체포한다.”

쿠쓰카케 요이치(輿掛良一ㆍ당시 25세)는 손목에 차가운 수갑이 채워진 뒤에야 자신이 헤어나오기 힘든 늪에 빠졌음을 실감했다. 경찰은 그녀가 죽은 방에서 그의 체모가, 그와 같은 B형 혈액이 검출됐다고 했다. 증거 앞에선 어떤 변명도 소용 없었다. 쿠쓰카케의 머릿속에선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그날의 기억이 숨바꼭질 하듯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가 주문처럼 되뇌었다.

‘그래도 나는 그녀를 죽이지 않았어. 그래도 나는….’

여대생의 죽음

일본 오이타(大分)현 여대 옆에 들어선 미도리(みどり) 아파트는 통학이 편해 이 학교 재학생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A와 B도 아파트 203호에 살았다. 한 살 터울 자매로 A가 언니, B가 동생이었다.

1981년 6월27일 밤 11시30분쯤. 연합 동아리 모임 1차 뒤풀이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B는 목욕물을 받기 위해 보일러를 켰다. A는 2차까지 갔지만, B는 목욕 생각이 간절했다. 1시간 뒤인 28일 새벽 0시30분. 2차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 A는 문 앞에 서자 등골이 오싹했다. 문은 열려 있고, 불은 전부 켜져 있었다.

부엌에 가니 하의가 벗겨진 채 숨을 쉬지 않고 있는 B의 모습이 보였다. 이미 싸늘한 시신이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탐문 조사를 통해 몇 가지 의미 있는 증언을 확보했다. 203호에서 남녀가 싸우는 듯한 소리가 났으며, 얼마 뒤 “살려주세요”, “도와주세요” 같은 여성 목소리가 들렸다는 것이다.

같은 시각, 옆방에 사는 202호 남자는 부스스한 머리로 잠에서 깼다. 집밖에서 웅성웅성 소리가 났다. 창문을 열어 아파트 공터를 쳐다봤다. 경찰이 이곳 저곳을 살펴보고 있었다. 남자는 경찰을 향해 소리쳤다. “무슨 일 있나요?” 전날 밤 진탕 마신 위스키 때문에 목이 잠겼는지, 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경찰은 남자를 향해 “1시간 전쯤 무슨 소리 듣지 못 했느냐”고 물었다. 남자는 “술에 취해 곯아떨어져 잘 기억이 안 난다”고 말했다. 남자의 이름은 쿠쓰카케 요이치. 호텔 웨이터로 일하는 평범한 20대 청년이었다.

수상한 청년, 쿠쓰카케

부검 결과, B의 사인은 질식사였다. 범행 도구는 B가 사망 전 메고 있던 멜빵으로 추정됐다. B의 몸과 입안에선 범인 것으로 보이는 정액, 체모, 묽은 피가 검출됐다. 방안에 크게 다툰 흔적은 없었다. 금품도 그대로였다. 범인은 젊은이들이 많이 사는 아파트에 한밤중 침입해 성폭행 살인을 저지를 만큼 배짱이 두둑한 사람이었다. 젊은 사람들에게 오후 11시는 잠들기 이른 시간이었다. 즉 ‘감시자’가 많다는 의미다. 경찰은 면식범 소행에 무게를 뒀다. B의 주변인들로 수사 범위를 좁혔다. 한 사람이 유력 용의선상에 올랐다. 옆집 남자 쿠쓰카케였다.

쿠쓰카케는 웨이터가 본업이나, 사실상 백수였다. 대부분의 경제 활동을 연하 동거녀에 의존했다. 쿠쓰카케와 동거녀는 아파트 202호에 살았다. 집 역시 동거녀 돈으로 마련한 것이었다. 쿠쓰카케는 사건 당일 밤 자신의 행적을 이렇게 기억했다. 그는 여자친구가 말다툼 끝에 본가로 돌아가자 가게에서 위스키를 사왔다. 직접 만든 고기볶음을 안주 삼아 호젓한 술판을 벌였다. 그리고 TV를 보다가 어느새 잠들었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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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이 쿠스카케를 의심한 건 몇 가지 이유에서다. 먼저 사건 당시 203호에서 “제법 큰 소리가 들렸다”는 여러 주민 증언에도 쿠쓰카케는 “아무 소리도 못 들었다”고 말한 게 문제였다. 남녀의 다툼 소리가 잠잠해지고, 202호 화장실에서 수도꼭지를 트는 소리가 났다는 1층 주민 진술도 있었다. 쿠쓰카케는 분명 범행 시간대 자고 있었다고 진술했다.

결정타는 피해자 방안에서 발견된 체모였다. 경찰은 이 체모가 쿠쓰카케의 체모와 일치한다는 일본과학경찰연구소(과경련)의 조사 결과를 같은 해 12월 입수했다. 뿐만 아니라 B에게서 검출된 묽은 피의 혈액형이 B형이라는 결과를 받았다. 공교롭게도 쿠쓰카케 역시 B형이었다. 모든 증거가 그를 범인이라 가리키는 듯했다. 해를 넘긴 1982년 1월 쿠쓰카케는 살인 혐의로 경찰에 체포됐다. 얼마 뒤, 언론은 쿠쓰카케의 자백 소식을 보도했다. 검찰은 같은 해 3월 쿠쓰카케를 살인 혐의로 정식 기소했다.

이상한 자백

변호사 후루타 쿠니오(古田邦夫)는 쿠쓰카케를 경찰서에서 처음 만났다. 1981년 12월 택시기사 폭행 혐의로 체포된 쿠쓰카케의 변호인 자격으로 찾아갔다. 살인 혐의로 체포되기 한달 전이었다. 당시 후루타는 경찰의 태도에서 이상함을 느꼈다. 비교적 가벼운 폭행사건인데도 쿠쓰카케를 풀어주기를 꺼려했다. 온갖 핑계를 대가며 그를 유치장에 주저 앉히려 했다. 후루타는 그때 처음 짐작했다. 어쩌면 쿠쓰카케가 B 살인사건의 ‘만들어진’ 용의자일 수 있다는 것을. 후루타가 이번 사건에 선뜻 뛰어든 이유였다.

1982년 3월10일. 후루타와 쿠쓰카케는 책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그간의 사정을 털어놓던 쿠쓰카케 입에서 충격적인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경찰이 과거 정신병력을 이유로 쿠쓰카케에게 마취제인 ‘아미탈(Amytal)’을 투여한 채 신문을 진행했다는 것. 정신과에서 심각한 트라우마로 환자가 대화를 거부할 때 쓰는 최면 유도법을 신문 과정에 악용한, 대단히 부적절한 행위였다. 더 큰 문제는 아미탈로 끌어낸 자백의 진실성이었다. 아미탈은 최면 효과가 강하기 때문에 말하는 내용이 사실인지, 상상인지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도 경찰은 쿠쓰카케의 자백 내용을 토대로 검찰에 송치한 것이다.

실제 자백 내용도 이상했다. 첫 공판(4월 26일)이 있기 10일 전 변호인단에 공개된 경찰 조사 서류에 따르면, 쿠쓰카케는 자백 당시 이렇게 말했다. “침입 경로, 범행 상황은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정신을 차려 보니 203호에 있었다. 그러니 내가 범인이다.” 자신은 B를 살해한 기억이 없지만 경찰이 주장하는 범행추정시각에 그 방에 있었던 기억은 나기 때문에 자신이 범인이라는, 곱씹을수록 이상한 내용이었다. 후루타는 점점 더 쿠쓰카케가 무죄라는 확신이 들었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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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간의 재판, 1심 무기징역… 그러나

재판은 7년 동안 총 52회 열렸다. 재판 과정의 ‘뜨거운 감자’는 자백의 신빙성이었다. 검찰은 피해자 방에서 발견된 쿠쓰카케의 체모, 진술의 구체성과 일관성 등을 이유로 그가 진범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쿠쓰카케 측은 발견된 체모 등을 토대로 쿠쓰카케가 사건 당시 피해자 방에 들렀을 가능성은 인정하면서도, 이것이 곧 살인의 증거가 될 순 없다고 맞섰다. 또 잠에서 깬 뒤 그가 경찰에게 “무슨 일이냐”고 먼저 물은 건 일반적인 범인의 태도로 보기 힘들고, 무엇보다 최면성 약물을 투여한 상태에서 자백이 이뤄졌기 때문에 자백 내용은 무효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오이타현 지방법원은 1989년 3월 쿠쓰카케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쿠쓰카케 측은 즉각 항소했다.

또 다시 5년간 법정 싸움이 계속됐다. 이번엔 머리카락이 화두로 떠올랐다. 사건 현장에서 범인의 것으로 보이는 머리카락이 추가 발견된 것. 그러나 쿠쓰카케는 당시 퍼머를 하고 있었다. 항소심을 맡은 후쿠오카 고등법원은 1994년 8월 쿠쓰카케에게 살인 용의자로는 이례적으로 보석을 허가했다. 1심에서 검찰이 제출했던 감정서는 2심에서 거의 다 반박됐다. 1995년 6월 30일 고법은 1심 판결을 뒤집고 쿠쓰카케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13년 만에 드디어 누명을 벗은 셈이었다. 같은 해 8월 검찰이 상고를 포기하며 쿠쓰카케는 완전한 자유인이 됐다.

쿠쓰카케는 현재 트럭운전사로 제2의 삶을 사는 것으로 알려졌다. 뿐만 아니라 올바른 사법제도 정착, 개혁을 위한 시민운동가로도 활동 중이다. 해당 사건은 1996년 6월28일 공소시효 만료되며 영구 미제사건으로 남게 됐다. 아직도 진범의 정체는 베일에 싸여 있다.

양원모 기자 ingodzone@hankookilbo.com

송영민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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