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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세상을 그리다] “비가 와도 장사는 하지, 그럼” 시장 속 삶들의 스케치

입력
2018.05.25 04:40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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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다프레스 제공
온다프레스 제공

“새벽에 집을 나와 짐을 싣고 장터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천막을 치는 거야.” 한 사내가 파라솔을 세우는 장면으로 이 그림책은 시작한다. 이어 둥글고 네모진 천막들이 어깨를 붙여 하늘을 채우고, 그 아래 삼삼오오 모여든 사람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지은이의 물음에 사람들이 대답한 말들, 이 책은 인터뷰 그림책이다. 2017년 봄부터 가을까지 지은이가 성남모란시장으로 출퇴근하며 파는 이와 사는 이들의 모습과 말들을 옮겨놓은 ‘시장과 그 너머의 삶에 관한 인터뷰’.

부제가 말하듯 그림책은 시장 사람들의 ‘지금 여기’의 생활과 ‘그때 거기’의 추억, 그리고 ‘나중 어디쯤’의 소망들을 차근차근 풀어낸다. 백화점 납품을 하다가 외환위기로 직접 장사를 시작했다는 이불장수 아주머니는 “몸은 좀 힘들어도 큰돈 굴리던 그때보다 마음은 훨씬 편하다”면서도 펼쳐 든 이불로 한사코 얼굴을 가리고, 언니와 둘이서 30년째 화초를 팔고 있다는 여인은 “언니 없으면 난 암것도 못해. 언니랑 있으면 나는 아직도 어린애”라며 과수원집 자매로 태어나 언니와 함께 나무 아래 뒹굴던 어린 시절을 아련히 돌아본다. 그런가 하면 평생 같이 일하던 아내가 무릎이 망가져 수술을 받았다는 할아버지는 ‘맘 편히 여행 한번 못 갔는데, 아내가 퇴원하면 제주도 구경이라도 같이 다녀오련다’는 소망을 수줍게 털어놓는데, 지은이가 그려 놓은 그이들의 생활과 추억과 소망은 그이들의 마음만큼이나 소박하고 곱고 애틋하다.

그뿐일까, 즐비한 천막 아래 복작대는 사람들의 지금과 그때와 나중의 이야기들이. ‘그 자리에서 반죽해 밀고 썰어 끓여야 맛있다’며 현장 반죽을 고집하는 칼국수장수, ‘마음은 늘 바다에 가 있다’는 활어장수, ‘같은 맥심도 내가 탄 커피가 제일 맛있다’는 커피장수, ‘날이 더우니 겨울 산이 그립다’며 등산바지를 사러 온 중년사내, ‘이 집 빤쓰만 사 입으니 천원만 더 빼 달라’며 속옷장수 손에 든 지폐 한 장을 우아하게 잡아채는 할머니, 소원을 묻자 다짜고짜 “로또나 터졌음 좋겄다.”는 아저씨, 무얼 묻든 희미하게 웃기만 하는 할아버지... 지은이의 눈길은 이들의 고집과 낭만과 자부심뿐만 아니라 인색과 허욕과 속 모를 침묵까지도 따뜻이 감싸 안는데, 그래선지 그가 그려낸 것들은 검정 비닐봉지와 양은 막걸리 잔과 만원에 석 장짜리 팬티와 싸구려 사탕까지도 이쁘게 가슴에 안겨 든다.

이야기를 그려 드립니다-시장과 그 너머의 삶에 관한 인터뷰

김은미 지음

온다프레스 발행∙ 92쪽∙1만원

삶이 무료할 땐 사는 맛을 찾아 재래시장에 간다는 이들이 적지 않다. 무료할 틈 없는 사람들이 말과 몸과 부대끼며 현물을 직접 주고받는 현장이니 사는 맛이 진할 수밖에. 허나 사철 쾌적한 냉난방에, 흥정도 승강이도 무거운 장바구니를 들고 다닐 필요도 없는 마트며 몰이 널린 세상에 굳이 시장을 일상으로 찾는 이들은 많지 않다. 하물며 그 흔한 비 가림 아케이드조차 없는, 재래 중에서도 재래시장에야. 그러니 그 시장을 담은 이런 그림책이 그닥 팔릴 것 같지도 않은데, 성실히 출근하며 그려낸 작가와 펴낸 출판사가 반갑고 또 고마울 뿐이다. 줄곧 주문 받은 그림을 그려오면서 자의반타의반으로 주장보다는 경청을 통해 남의 마음속을 들여다보는 나름의 노하우를 갖게 됐다는 작가와, ‘중앙’의 큰 출판사를 관둔 편집자가 ‘변방’의 바닷가에 차린 조그만 출판사가 의기투합했다니 더욱 그렇다. 책 속 비에 젖어 늘어진 천막 아래서 한 상인이 심상히 툭 던진 말이 오래 남는다. “비가 와도 장사는 하지, 그럼.”

김장성 그림책 작가∙출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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