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교회협의회 국제회의
성소수자 목회 선언문 채택
“아시겠지만 필리핀은 보수적인 천주교 사회입니다. 교회, 학교, 집, 그 어느 곳도 저의 피난처가 되지 못했습니다. 마약 중독에도 빠지고 자살 충동에도 시달렸습니다. 하루하루 생매장 당하는 기분으로 살았습니다. 교회가 나를 긍정해주었기에 이렇게 활동할 수 있었습니다.”
20일 이런 말을 쏟아낸 필리핀의 존 라이언 멘도자의 얼굴은 회한에 차 있었고, 눈알은 벌겋게 물들어갔다.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사회에서, 특히 사랑으로 감싸주리라 믿었던 교회에서 외면 당해온 세월에 대한 얘기였다. 그러나 그는 지금은 필리핀기독교교회협의회(NCCP)의 주요 멤버로서 당당하게 활동하고 있다.
독일의 카스텐 코에버 목사는 “동성애 문제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자유와 존엄에 관한 문제”라면서 “기독교인에게 생명은 혐오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되고 문제가 있다면 오직 대화를 필요로 할 뿐”이라고 강조했다. 캐나다의 마이클 블레어 목사 또한 “모든 교회가 부르짖는 것이 정의와 평화인데 묘하게도 성 문제만 나오면 다리가 묶인다”며 “성 문제만 따로 떼놓거나 성소수자들에게만은 정의와 평화의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들은 지난 17,18일 이틀간 서울 동대문의 한 호텔에서 열린 ‘함께하는 여정: 포용과 환대의 공동체를 향하여’ 국제회의 참석차 한국을 찾았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YMCA 공동 주최로 성소수자 목회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열린 이 회의에는 한국을 비롯해 미국 영국 캐나다 독일 뉴질랜드 대만 일본 등 8개국 교회 관계자 30여명이 모여 각국의 현실, 어려움, 앞으로의 계획 등을 허심탄회하게 나눴다.
특히 주목되는 건 이번 회의가 폐막과 함께 ‘공동 커뮤니케’를 채택했다는 점이다. ‘삶을 택하기: 환대의 공동체 만들기’란 제목의 공동 커뮤니케는 한국에서 ▦차별금지법 제정 ▦2020년까지 성소수자들을 위한 목회 매뉴얼 마련 ▦교회 내 성소수자들을 위한 피난처 개설 추진 등을 위해 세계 교회가 협력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멘도자, 코에버, 블레어는 이 커뮤니케 작성을 주도한 인물들이다. 동성 결혼을 감행한 김조광수 감독과 NCCK간 만남 행사가 개신교계 강경 보수 인사들의 반발과 난입으로 난장판이 된 2016년 4월 이후 2년 만의 시도다.
지금 필리핀, 독일, 캐나다의 상황은 어떨까. 멘도자는 “2015년 교회 내 성소수자 문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필리핀 사회가 이 정도 논의를 감당해낼 수 있을 정도로 성숙되어 있는가에 대해 회의, 걱정이 많았다”면서도 “지금은 우군이 많이 생겨서 최소한 방해받지 않고 논의할 수 있는 수준은 된다”고 말했다. 코에버와 블레어 목사는 오히려 교회의 긍정적 역할을 강조했다. “성소수자 문제가 본격화됐을 때 오히려 교회 공동체가 먼저 나서서 ‘종교적 입장에서 그들을 이단시, 사탄화하는 것은 영성에 어긋난다’고 주장하면서 정부와 사회를 설득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교회란 그 누구라도 사랑으로 끌어안아야 한다는 점에 동의했다는 얘기다.
상황은 여의치 않다. 김조광수 사태 이후 개신교계는 교단 차원에서 동성애자 축출을 명시화한 곳이 많다. NCCK 관계자는 “동성애 그 자체가 죄냐 아니냐, 그래서 우리 교회가 그들을 수용해야 하느냐 마느냐 판단하기 이전에, 성소수자들이 현실적으로 존재한다는 점에 우리는 주목한다”며 “찬성이나 옹호가 아니라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그들과 어떻게 만나야 하는지, 그 고민의 시작이라고 봐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