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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번 돈 지구, 들개의 위협… 촬영 장소 탐험의 세계

입력
2018.05.19 10:00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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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영 로케이션플러스 대표가 자신이 찾아 다닌 촬영 장소들을 컴퓨터에 정리하고 있다. 대중의 눈을 사로잡는 영상 속 공간들은 김 대표 같은 로케이션 매니저의 땀이 빚어낸 결과다. 홍인기 기자
김태영 로케이션플러스 대표가 자신이 찾아 다닌 촬영 장소들을 컴퓨터에 정리하고 있다. 대중의 눈을 사로잡는 영상 속 공간들은 김 대표 같은 로케이션 매니저의 땀이 빚어낸 결과다. 홍인기 기자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배우 박신혜와 소지섭은 가수 나훈아의 ‘님과 함께’ 노랫말 속에 나올 법한 집에 홀로 산다. 화려한 저택은 아니지만, 초원 위에 세워진 소박한 오두막은 동화 속 집처럼 아늑하다.

두 사람은 인적이라곤 찾을 수 없는, 오롯이 자연이 주인인 이 집에서 느리게 사는 삶을 실천 중이다. tvN 예능프로그램 ‘숲속의 작은 집’을 통해서다. 박신혜와 소지섭은 오두막을 나서 낙엽 위로 투덕투덕 떨어지는 빗소리를 멍하니 듣고 있거나, 얼어 붙은 검은 땅을 뚫고 이제 막 노란 고개를 내민 민들레를 신기해 하며 자연을 마주한다. 소처럼 일하다 ‘사축’(회사의 가축)이 돼 피로로 찌든 슬픈 존재들이 보면 당장 배낭을 메고 훅 떠나고 싶은 충동이 절로 들 수 밖에 없다.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이 숲은 과연 누가, 어떻게 찾았을까.

tvN 예능프로그램 ‘숲속의 작은 집’(위쪽 사진)은 숲 속 오두막만으로도 시청자의 눈길을 끈다. 김태영 로케이션플러스 대표가 제주도를 뒤져 찾아낸 곳이다.
tvN 예능프로그램 ‘숲속의 작은 집’(위쪽 사진)은 숲 속 오두막만으로도 시청자의 눈길을 끈다. 김태영 로케이션플러스 대표가 제주도를 뒤져 찾아낸 곳이다.

박신혜ㆍ소지섭 오두막 나오기까지

김태영(46) 로케이션플러스 대표는 올 초 나영석 PD가 제작을 총괄하는 ‘숲속의 작은집’ 제작진으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방송 콘셉트에 맞는 촬영지를 찾아달라는 연락이었다. 촬영은 3월부터 시작된다고 했다.

김 대표는 바로 제주를 떠올렸다. 목장이 있는 목초지는 피했다. 구제역으로 행여 촬영을 하다 피해를 보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서였다. 인터넷으로 사전 조사를 마친 김 대표는 지난 2월 배낭을 챙겨 제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3주 동안 숲을 찾아 헤매다 “제주 중산간에 있는 어느 숲”을 발견했다. 버려진 축사, 버려진 게르형 텐트... 황량하고 묘한 분위기에 이끌려 주위를 걷다 찾은 행운이었다. 방송에 나온 바로 그 장소다.

‘유레카(바로 이거야)’를 외치기 전까진 역경의 연속이었다. 이 숲으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김 대표는 야생 들개 일곱 마리를 만났다. 갈비뼈가 다 드러날 정도로 메말라 있지만, 떠도는 야생 짐승이 흰 이빨을 드러내며 짖은 앙칼진 소리에 간담이 서늘했다. 김 대표는 주위의 나뭇가지를 꺾었다. 영화 ‘반지의 제왕’ 간달프(이안 맥켈런)처럼 나뭇가지를 마법의 지팡이 삼아 휘저어 들개의 급습을 간신히 피했다. 김 대표는 “그 때만 생각하면 아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곳을 찾아갈 때면 종종 맞닥뜨리는 위기였다. 이후 김 대표는 늘 등산용 지팡이를 챙겨 촬영장 섭외에 나선다고 한다. 최근 서울 성동구 광나루로에 있는 김 대표의 사무실에서 만나 그가 들려준 ‘숲속의 작은 집’ 촬영지 섭외 뒷얘기였다.

김 대표가 운영하는 로케이션플러스는 촬영 장소 전문 섭외 회사다. 오전 10시쯤 찾아간 사무실에서 그는 고장난 킥보드 바퀴를 수리하고 있었다. 김 대표는 차가 들어가지 못한 좁은 길은 킥보드를 타고 공간 탐험에 나선다.

영화 '아저씨'의 어린 여주인공 소미가 낡고 후미진 골목길로 걸어 들어가고 있다(위쪽 사진ㆍ영화 캡처).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소미의 현실을 공간이 압축해 보여준다. 아래 사진은 촬영 장소로 쓰인 부산 실제 골목 모습. 김태영 제공
영화 '아저씨'의 어린 여주인공 소미가 낡고 후미진 골목길로 걸어 들어가고 있다(위쪽 사진ㆍ영화 캡처).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소미의 현실을 공간이 압축해 보여준다. 아래 사진은 촬영 장소로 쓰인 부산 실제 골목 모습. 김태영 제공

기름값만 한 달 최소 250만원… 좌골신경통은 직업병

김 대표처럼 드라마와 영화, 뮤직비디오, CF 촬영 등에 필요한 장소 섭외를 전문으로 하는 이를 로케이션 매니저라 부른다. 대본이나 큐시트(촬영 계획표)가 나오면 알맞은 장소를 찾아 전국을 누빈다. 촬영 장소 확정까지 최소 세 번은 사전답사를 한다. 김 대표는 2001년부터 이 일을 시작했다. 김 대표가 차 4대를 바꿔가며 17년 동안 이동한 거리는 약 97만 ㎞. 지구 한 바퀴가 4만 ㎞이니 약 24번을 돈 셈이다. 바쁠 때는 이틀간 1,300㎞를 운전한 적도 있다. 한 달 차 기름값만 해도 최소 250만원. 평생 운전대를 잡고 콜럼버스처럼 공간 헌팅에 나서다 보니 좌골신경통이 생겼다. 앉아서 오래 운전을 해 생긴 직업병이다. 이 고난의 행군 끝에 김 대표가 확보한 사진 자료는 190만장에 이른다.

김 대표는 대형 교통 사고를 당하진 않았지만, 그의 회사 직원은 장소 섭외를 하러 가다 눈길에 차가 미끄러져 차가 완파되는 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여행하며 좋은 곳 보러 다닌다’는 낭만 어린 생각은 사치다. 고되고 강한 추진력이 필요한 일이라 김 대표는 후배들을 ‘전투 요원’이라 부른다. 작품도 제대로 즐기지 못한다. 김 대표는 “영화를 보면 인물은 보이지 않고 장소만 보인다”며 웃었다.

장소 섭외를 나갔다 차가 고장나 애를 먹고 있는 김태영 로케이션플러스 대표. 김태영 제공
장소 섭외를 나갔다 차가 고장나 애를 먹고 있는 김태영 로케이션플러스 대표. 김태영 제공

환경 오염 방지 전기차까지 빌려 설득

김 대표는 ‘아저씨’ ‘타짜’ ‘쌍화점’ 등 8편의 영화와 3,000여 편의 TV 광고 제작에 참여했다. 김 대표는 “눈에 보이는 풍경이 화면에서 어떻게 빛을 발할지를 상상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했다. ‘아저씨’에선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소미(김새론)가 차태식(원빈)이 운영하는 전당포를 찾아가는 장면이 나온다. 대본을 보고 장소 섭외에 나선 김 대표는 부산 동구에서 매축지 마을을 발견했다. 교차로에서 운전을 하다 돌아 본 골목 풍경이 우연히 눈에 들어왔다. 좁디 좁은, 굽이진 골목길과 저 멀리 우뚝 솟은 아파트촌의 기괴함. 김 대표는 “길은 좁아야 비관적”이라며 “가까운 현실(골목길)은 우울한데 저 멀리 보이는 우뚝 솟은 아파트촌이 잡을 수 없는 꿈 같은 이미지를 줘 이 곳을 섭외했고, 영화에 주요 장소로 활용됐다”고 말했다. 단지 보기 좋을 것 같다고 해서 촬영 장소로 낙점되는 게 아니다. 특정 장소의 촬영 가능 여부와 관리자의 허가, 수백 여명의 촬영 스태프와 관련 장비 진입 그리고 빛과 주변 소음 등에 문제가 없어야 한다. 그만큼 챙겨야 할 게 많다. 촬영 허가를 받아내는 게 관건이다. 김 대표는 태안해안국립공원에서 촬영하기 위해 전기차를 따로 빌렸다. 환경 오염 문제로 촬영 허가가 나지 않자 친환경 차로 촬영 허가를 받아낸 것이다. 로케이션 매니저로선 베테랑급인 김 대표에게 최근 또 하나의 숙제가 주어졌다. 김 대표는 “(천주교) 사제를 소재로 한 새 영화에서 신부와 악령이 성당에서 싸우는 장면이 있는데 이 공간을 섭외하느라 좀 애를 먹고 있다”며 웃었다. 신성한 성당에서 격투 장면을 찍는 게 성당 측으로선 부담인 모양이다. 그는 “장소 섭외에 가장 중요한 과정은 설득과 협의”라고 했다. 그래도 종이에 그림을 그려 똑같은 곳을 찾아오라는 제작사의 주문은 여전히 난감하다.

사진만으로 부족하다. 드론을 띄어 영상으로 현장의 모습을 찍기도 한다. 김태영 로케이션플러스 대표가 갓길에 차를 세운 뒤 영상 촬영을 위해 드론을 조종하고 있는 모습. 김태영 제공
사진만으로 부족하다. 드론을 띄어 영상으로 현장의 모습을 찍기도 한다. 김태영 로케이션플러스 대표가 갓길에 차를 세운 뒤 영상 촬영을 위해 드론을 조종하고 있는 모습. 김태영 제공

“사람과 공간을 잇는 다리”

요즘은 장소 섭외도 전문화되는 추세다. 1인에서 팀 단위로 움직인다. 김 대표는 팀원들과 ‘아저씨’ 촬영에 반년을 매달려 장소 섭외비로 4,000만원을 받았다. 일을 시작할 땐 맨땅에 헤딩이었다. 김 대표는 2002년 대학 동기 두 명과 500만원씩 내 서울 용산구 숙명여대 인근 건물 지하에 13㎡(4평)의 사무실을 얻어 본격적으로 일을 벌였다. 처음엔 “사람 만나며 새로운 공간을 찾아다니는 일에 대한 매력에 이끌려” 시작했다. 하지만 첫해엔 돈을 손에 쥘 수 없었다. 장소 섭외란 일이 전문직으로 인정받지 못할 때다. 김 대표는 CD에 홍보 영상을 담은 뒤 여러 제작사를 돌며 직접 판촉에 나섰다. 일거리가 없어 처음엔 인터넷 영어 강의 촬영으로 생계를 이었다. 고난을 버틴 데는 공간의 발견에 희열을 느꼈기 때문이다.

“로케이션 매니저의 직업적 가치는 사람과 공간을 잇는 데 있어요. 그냥 스쳐 지나가는 공간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끌어 내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거죠. 새로운 것과 변화하는 것들을 지켜보는 재미도 쏠쏠하고요.”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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