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프린스에드워드 섬에는 빨강머리 앤이 살았던 집을 재현한 그린 게이블스 하우스(green gables house)가 있다.
밝은 초록색 지붕이 얹힌 집에서 주근깨투성이 고아 소녀 앤은 자신의 초라한 운명에 굴하지 않고 매일 아침 녹색 덧창을 힘차게 밀어 젖혔다. 한국에도 앤의 집이 있다. 경기 용인시의 초록 지붕집 시수(Sisoo) 하우스는 쓸고 닦고 고치는 걸 좋아하는 부지런한 부부가 지은 집이다. 어린 두 아들에게 앤이 느꼈던 기쁨을 그대로 느끼게 해주고 싶었던 부부는 아이들의 이름 한 자씩을 따 초록지붕을 얹은 집을 지었다.
녹색 지붕의 꿈
부부는 준비된 건축주였다. 단독주택에서 사니 손 갈 데가 너무 많더라는 주변의 불평에도 이들의 꿈은 흔들리지 않았다. “저희 둘 다 소유욕이 좀 있다고 할까요. 내 것 하나를 가지고 아끼고 고치면서 오래 쓰는 걸 좋아해요. 그런데 아파트는 내 집인데도 내 집 같지가 않더라고요. 어릴 때 단독주택에 살며 느꼈던 행복을 우리 아이들에게도 전해주고 싶었어요.”
그러나 막상 땅을 사고 어떤 집을 지을까 란 질문으로 넘어가니 대답이 쉽지 않았다. 남편은 나름대로 생각해둔 게 있었지만 아내에게 전권을 넘겼다. 아내의 입에서 나온 것은 빨강머리 앤의 집이었다. 이제 고민은 건축가에게로 넘어갔다. 1900년대 캐나다에서 지어진 집을 2010년대 한국에서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
설계를 맡은 목정훈(모쿠디자인연구소) 건축가는 ‘왜 빨강머리 앤의 집인가’를 두고 건축주와 길고 긴 대화를 나눴다. “소설에서 보면 앤이 남자애를 원했던 집에 잘못 입양 가잖아요. 자신을 돌려보내겠다는 말에 낙심해 실컷 운 뒤 잠들었다가 다음날 아침 완전히 새로운 기분으로 깨어나요. 제가 느끼기에 건축주가 이 집에서 원하는 건 그거 하나였어요.”
무엇에도 굴하지 않는 해맑은 에너지. 건축가는 이를 집으로 형상화하는 과정에서 밝은 초록과 기역(ㄱ)자로 꺾인 구조를 제외하고 나머지 외적 요소는 모두 버렸다. 집의 구체적인 장식들을 그대로 재현하는 건 불필요할 뿐 아니라 한국 수도권 상황과도 맞지 않았다. 시수 하우스가 위치한 곳은 자연녹지구역으로 건폐율 20%라는 제약에 묶여 있었다.
288㎡(약 87평) 크기의 땅에 건축면적은 겨우 57.35㎡(약 17평). 네 가족이 사는 데 불편이 없기 위해 집은 3층으로 올라갔다. 기역자 구조는 마당을 감싸는 시옷(ㅅ)자 형태로 바뀌었다. “집이 작은데 기역자로 꺾이면 내부에서도 불편하고 햇볕을 받는 면적이 줄어들거든요. 남쪽 마당과의 접점을 최대한 늘리기 위해 두 채의 각도를 150도로 약간 펼쳤습니다. 두 건물이 겹치는 부분은 자연스럽게 계단실이 됐고요.”
좁고 긴 건물 두 채가 어긋맞긴 모양은, 중세 네덜란드의 다닥다닥 붙은 목조주택들을 연상케 하기도 한다. 내부로 들어가면 채의 구분은 잘 느껴지지 않지만 그래도 건축주는 바깥에서 두 개의 건물이 붙은 것처럼 보이길 원했다. 이유는 단순하다. “한 채는 재미 없잖아요.”
녹색의 창틀과 지붕은 오밀조밀한 집에 재미를 더한다. 녹색은 주택 시공에서 잘 쓰지 않는 색이라 건축가와 건축주 모두 고르는 데 애를 먹었다. “내장재와 달리 외장재는 내구성 때문에 공장에서 완성품으로 나와요. 그래서 색 선택이 극히 제한적이죠. 지붕재는 아예 초록색이 없어서 그나마 녹색과 가장 가까운 색을 택한 거예요.” 다행히 창틀은 그나마 상상했던 것과 가까운 색을 고를 수 있었다. 앤처럼 매일을 설렘으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 밝은 초록이다.
공간 꽉 채우기 보다 아이들 위해 비워놔
두 아들에게 기쁨을 선물하기 위해 지은 집인 만큼 1층부터 3층, 그리고 마당까지 사실상 모든 곳이 아이들을 위한 공간이다. 2층 아이들 방에는 가파른 사다리를 하나씩 놓아 다락으로 올라가 만날 수 있게 했다. 삼각지붕의 내부구조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다락층은 사실 3층이다. 다락은 건축법상 면적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층고를 살짝 높여 3층처럼 쓰는 경우가 많지만, 건축가는 이와 반대로 3층을 다락층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다락은 누구에게나 로망이잖아요. 아이들이 의자를 세우고 이불을 덮어 그 안으로 기어들어가는 것을 최초의 건축적 행위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3층이 그런 본능적인 만족감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기를 바랐어요.”
아직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인 두 아들은 2층 각자의 방을 놔두고 꾸역꾸역 계단을 올라 3층에 이른다. 두 채의 뒤틀림과 지붕의 경사면이 자아내는 천장의 수많은 각, 그 아래 정글짐처럼 설치된 계단식 수납장, 뻐꾸기 창문과 둥근 창문. 아이들에겐 모든 행복과 기쁨이 여기에 있다. 엄마가 재봉틀을 꺼내 커튼을 만드는 동안 아이들은 수납장 안을 다람쥐처럼 들락날락한다.
“2층에 드레스룸이 없어서 3층에 설치하려고 했는데 모든 공간을 기능으로 꽉 채우는 것보단 아이들을 위한 비워진 공간이 있으면 좋을 것 같아 그냥 장롱으로 대신했어요. 수납장은 이불이나 원단을 보관하는 용도인데 안에 칸막이가 있으면 아이들이 너무 서운해해서 칸막이도 다 빼놨어요.”
바깥으로 돌출된 뻐꾸기 창은 집이 가진 활력의 정점이다. 앤이 힘껏 밀어젖혔던 창과 똑 같은 모양의 창은 집 안에 스미는 슬픔과 절망도 거뜬히 밀어젖힐 것 같다. 지난해 9월 입주한 후 가을과 겨울을 보낸 가족은 그새 단독주택 살이에 익숙해졌다. 마당에서 뛰노는 아이들을 집 안으로 불러들이는 게 엄마의 일과 중 하나다. 아침에 눈이 오면 그 날은 어린이집에 결석하는 날이다. 눈 쌓이는 멋진 마당을 두고 어린이집에 갈 수 없다는 자연스런 합의가 생긴 것이다.
“집을 짓고 얼마 안 있어 큰 아들이 그림 그릴 때 집을 그리더라고요. 4년 평생 자동차만 그리던 애거든요(웃음). ‘우리 집은 초록지붕 집’이라고 해요. 처음 지붕을 초록색으로 하겠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 ‘후회하지 않겠냐’는 말을 정말 많이 들었어요. 그때 굽히지 않은 게 정말 잘한 일 같아요.”
황수현 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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