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 쇼와 영화ㆍ연극, TV 연속극 등에 출연하며 연기와 노래로 20세기 중반 한국 대중문화의 중심에 섰던 예술인 김희갑이 1993년 5월 18일, 만 70세로 별세했다. 그는 박정희 정권의 국책영화 ‘팔도강산’ 연작과 드라마 ‘꽃피는 팔도강산’을 비롯, ‘자유부인’ ‘와룡선생 상경기’ ‘오부자’ 등 700여 편의 영화와 다수의 드라마에 출연했고, 구성진 트로트로 몇 개의 음반을 냈으며, 자서전 ‘어느 광대의 사랑’(삼진기획, 1992)을 썼다.
1922년 함경남도 장진의 개마고원 기슭에서 태어난 그는 1940년 일본으로 건너가 “등록금만 내면 누구나 입학”했다는 메이지대 별과에서 1년 남짓 공부한 뒤 귀국해 조선전업주식회사에 취직도 하고, 45년 대동신문사라는 월급 없는 신문사에 입사해 장택상이 수도청장(서울시장)이던 수도청 출입기자로도 일했다. 모두 체질에 맞지 않아 떠돌던 그는 46년 3월 동향 출신 독문학자겸 연극 연출가 서항석을 만나 ‘반도가극단’(옛 중앙극장) 프롬프터로 취직했다. 막 뒤에 숨어 배우가 대사를 까먹으면 속삭여주는 게 프롬프터의 역할이었다. 그 해 11월 ‘장화홍련전’ 사또 역을 맡은 배우의 대역으로 무대에 선 이래 그는 탁월한 연기력으로 금세 주연급 희극배우가 됐다.
자서전의 주조(主潮)는 페이소스라 할 만하다. 서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막이 내리고/ 관객은 가고/ 분칠한 배우들마저 제 모습을 찾아 사라지고 나면/ 그제사 무대 옆 솔기 너덜한 휘장을 젖히고 나와/ 빈 무대에 허허로이 서보는/ 늙은 프롬프터를 당신은 아는가/(···)”
그는 46년 10월 군정기의 대구폭동과 자유당 말기인 59년 정치깡패 임화수의 횡포, 그에게 맞아 갈비뼈 세 대가 부러지는 전치 8주의 중상을 입지만 끝내 고집을 굽히지 않고 버텨 임화수의 공직 사퇴(영화제작자협 부회장, 반공예술인단 단장, 전국극장연합회 부회장 등)를 이끌어낸 일, 박정희 시절의 국책 영화 출연 등 정치와 권력에 휘둘릴 수 밖에 없었던 희극배우의 비애를 담담하게 기록했다.
그는 가수 최희준이 부른 ‘팔도강산’(신봉승 작사, 이봉조 작곡)의 노랫말 “팔도강산 얼싸안고···좋구나 좋아”를 인용하며, “당대를 살아가던 이 땅의 사람들 중 이 강산이 누구에게 그토록 좋고 좋았는지”라고 맺은 뒤, 70년대 이후 이야기는 다음에 쓰기로 하고 “이쯤에서 잠시 쉬자”고 썼다. 그리고 이듬해 별세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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