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 이후 ‘성공한 쿠데타’ 3번
軍 직접 통치한 기간 31년 달해
# 軍 관계 나쁜 샤리프 前총리 휘청
운동선수 출신 임란 칸은 상승세
軍에 동조하며 反美 노골적 행보
# “양당 모두 과반 의석 쉽잖을 듯”
군부 입맛대로 정치 흘러갈 수도
“지난 4년간 선출된 정부에 대항했던 ‘저강도 쿠데타(creeping coupㆍ슬금슬금 기어올라가는 쿠데타)’가 마침내 최종 단계에 접어 들었다.”
파키스탄 상원의원 출신 인권운동가 아프라시압 카탁은 지난 8일 아산 이크발 내무장관 총격 피습 사건과 관련, 이 같은 논평을 냈다. 당시 지역구 모임에 들렀다 귀가하던 이크발 장관을 공격한 괴한은 군인이 아니었다. 이슬람 강경파 소수정당 ‘테리크-이-라바이크’의 당원일 뿐이었다. 군부를 배후로 볼 만한 유력한 정황도 없었다. 그런데도 카탁이 ‘쿠데타’라는 단어를 쓴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1947년 영국 식민지배에서 벗어난 파키스탄의 현대 정치사는 군부의 잦은 정치개입으로 얼룩진 역사다. 독립 이후 71년간 세 차례의 ‘성공한 쿠데타’에 따른 군부의 직접 통치 기간은 무려 31년에 달한다. 나머지 40년 동안에도 군의 정치적 영향력은 막강했다. 특히 외교 정책은 실질적으로 좌지우지했다. 군부와 ‘좋은 관계’를 맺지 않은 정치세력이 권력을 온전히 유지하기란 불가능했다.
이런 가운데 오는 7월(날짜 미정) 치러질 예정인 총선은 파키스탄 정치사의 중대 이정표로 기록될 만하다. 이 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2008년과 2013년에 이어 세 번 연속 민주적 선거를 통한 정부가 출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번 선거 정국이 군부의 바람대로 흘러가고 있으며, 곳곳에서 군부의 ‘그림자’가 느껴진다는 점이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이크발 장관 암살 시도는 (정정 불안으로) 정치인을 무력화하고 강력한 다수파, 곧 강한 정부의 등장을 억제하는데, 이는 군부가 선거에 영향을 끼치기에 이상적인 조건”이라고 13일 보도했다.
실제로 이번 총선의 숨은 ‘키 플레이어’는 다름아닌 군부다. 내각제 국가인 파키스탄의 주요 정당은 전체 의석 수 342석 중 189석을 차지하고 있는 현 집권여당 ‘파키스탄 무슬림 리그’(PML-N), 그리고 제 1, 2야당인 ‘파키스탄 인민당’(PPP, 42석)과 ‘파키스탄 정의운동’(PTI, 35석) 등 3곳이다. 외신은 그러나 이번 선거 구도를 PML-N과 PTI의 2파전으로 본다. 지난 3월 갤럽파키스탄의 정당 지지율 조사에서 PML-N은 36%, PTI는 24%를 각각 기록한 반면, ‘파키스탄 민주화의 상징’ 베나지르 부토(2007년 사망)의 아들 발라왈 부토(30)가 이끄는 PPP는 17%에 그쳤기 때문이다. 게다가 PML-N과 PTI의 격차는 점점 좁혀지는 추세인데, 양측의 결정적 차이는 바로 군부와의 관계에 있다.
PML-N의 설립자이자 2013년 총선 승리로 세 번째 총리직을 꿰찬 나와즈 샤리프(69) 전 총리는 지난해 7월 부패 스캔들로 실각했으나 여전히 당의 최고 실세다. 1990년대 두 차례 총리직에 오른 그는 1차 임기 땐 대통령과 갈등을 겪다 해임됐고, 2차 임기 땐 페르베즈 무샤라프 장군의 쿠데타로 실각했다. 3선 총리 시절, 군부의 영향력을 줄이고자 종종 군과 대립각을 세웠던 건 어쩌면 당연했다. 군부의 시각에서 그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2016년 4월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의 조세회피 폭로자료인 ‘파나마 페이퍼스’ 공개는 군에 상당한 호재였다. 샤리프의 자녀 3명이 조세회피처에 페이퍼컴퍼니 5곳을 설립, 영국 런던 아파트를 불법 소유한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지난해 7월 대법관 5명 만장일치로 총리직에서 밀려난 샤리프는 올해 2월에는 당 대표직마저 박탈당해 선거 출마도 불가능해졌다. 다음달쯤 이 사건의 형사 판결을 앞둔 그는 유죄 선고 땐 징역 14년형에 처해질 수 있다.
샤리프는 이를 ‘사법 계엄령’이라면서 결백을 호소하고 있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이번 총선은 선거관리위원회가 아니라 (군부와 사법부라는) 외계인(aliens)에 의해 진행된다”며 “민주주의 대 폭정의 대결”이라고 말했다. “민주주의의 뿌리를 내린 오랜 투쟁이 올 여름 선거로 위험에 빠졌다”고도 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샤리프와 군ㆍ사법부 간 충돌이 파키스탄의 허약한 민주주의를 뒤흔들고 있다”면서 또다시 정치적 불안정이 초래되고 있다고 전했다. 이슬라마바드의 씽크탱크 필닷(PILDAT)의 아흐메드 빌랄 메부브 소장도 “시스템의 수호자임을 자처하는 (군과 사법부 등) 기관들이 사실 시스템의 파괴자”라며 “기관들이 서로의 일에 간섭하기 시작하면, 결국 무정부 상태를 낳는다”고 우려했다.
샤리프의 부패 스캔들에 외무장관, 재무장관까지 함께 연루돼 PML-N이 휘청대는 사이, 전설적인 크리켓 선수 출신인 PTI 대표 임란 칸(66)이 무서운 상승세를 타고 있다. 현 정권의 부패를 맹공격하면서 ‘새로운 파키스탄 건설’을 주창하는 그는 포퓰리즘적 공약으로 빈곤층의 표심을 사로잡고 있다. ▦주택 500만채 건축 ▦농민들에 저이자 대출 ▦세계적 수준의 학교와 병원 건설 등이 대표적이다.
보다 눈에 띄는 대목은 노골적인 군부 친화적 행보다. 미국에 적대적인 군에 동조하며 반미 구호를 외치는 것은 물론, “민주적 정부가 도덕적 권위를 잃으면 물리적 권위(군대)가 전면에 등장하기 마련인데, 그들은 적군이 아니라 파키스탄 군대다. 나는 군과 동행할 것”이라면서 군의 정치 개입을 스스럼없이 인정한다. 심지어 군부 비판 여론을 탄압하고 있는 카마르 자베드 바즈와 육군참모총장을 “내가 지금까지 본 가장 친(親)민주주의적인 사람”이라고 칭찬했다. ‘군부의 애완견’이라는 일각의 비난도 개의치 않는다.
뉴욕타임스는 지난 6일 “파키스탄의 주요 권력 수단을 쥐고 있는 군부를 등에 업은 칸의 총선 전망이 더욱 밝아졌다”며 그의 집권을 점쳤다. 로이터통신도 11일 “악재가 잇따라 터지는 여당의 재집권 희망은 점점 옅어지고 있다”고 전했다. 실제로 최근 3년간 칸 개인에 대한 지지율은 샤리프보다 12~24%포인트 뒤졌지만, 올해 들어 차이는 3%포인트(칸 46%ㆍ샤리프 49%)로 좁혀졌다. 샤리프의 턱밑까지 치고 올라간 셈이다. 이제 역전은 시간 문제라는 관측도 나온다.
그러나 속단은 이르다. ‘부패 정치인’이라는 꼬리표와 상관없이 샤리프 지지집회는 지금도 수많은 인파로 붐빈다. 아울러 직접 선출 의석 272석 중 절반이 넘는 143석이 할당된 펀자브주(州)는 1980년대 샤리프가, 2008년 이후에는 동생 샤바즈 샤리프 현 PML-N 대표가 각각 주총리를 지냈던 곳이다. 최대 승부처에서 샤리프 형제의 압승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얘기다. ‘문민 민주주의의 수호’(샤리프)와 ‘부패 정치 엘리트 심판’(칸)으로 요약되는 양측의 선거 프레임 중 어떤 게 유권자들에게 먹힐지는 현재로선 미지수다. 확실한 사실은 어느 쪽도 과반 이상의 의석을 확보하긴 쉽지 않아 ‘약한 정부’가 탄생할 공산이 크고, 이것이 바로 군부가 노리는 최상의 시나리오라는 점이다.
김정우 기자 wookim@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