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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귀인을 기다리며

입력
2018.05.16 18:27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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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초에 재미삼아서, 혹은 마음이 답답할 때 들여다보는 토정비결에는 종종 언제 어느 방향에서 귀인(貴人)을 만나고 도움을 받을 것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반가운 그 귀인이 누구일까, 혹시 내가 못 알아보고 지나치면 어쩌나, 그 귀한 사람이 내게 무슨 좋은 일을 가져다줄까 자못 궁금해지기 마련이다.

귀인은 신분이나 지위가 높은 사람을 뜻하지만, 중요한 일이나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도움을 주는 사람을 지칭하기도 한다. 자신의 힘으로 잘 풀리지 않는 일들을 안고 있을 때, 또 간절히 원하는 것이 있을 때 누군가 옆에서 도와 줄 것이라는 기대는 용기를 잃지 말라는 자기 암시가 된다. 백지장 하나라도 맞들어주는 사람이 있을 때 철판 하나를 너끈히 들 힘이 나올 수도 있다. 사실 살아가면서 가장 큰 기쁨을 주는 것도, 가장 큰 괴로움을 주는 것도 사람들과의 관계이다.

우리는 행복하게 해 주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가? 자신이 잘 하는 것을 좋아해줄 사람이 옆에 있다는 것은 신나는 일이다. 칭찬받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인간 본성이다.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사람이 있다면 더 큰 발전의 동력이 생긴다. 자신의 얘기를 들어주고 편들어주는 사람이 있으면 위안이 된다. 그런 사람들이 주위에 있다는 것은 다복한 일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자신의 부족함을 지적하고 나무라는 사람들을 더 자주 만나게 된다. 마음이 무거워진다. 자신이 잘 하는 것을 깎아내리고 무시하는 얘기들을 듣기도 한다. 의기소침해진다. 자신이 했던 열 가지 중 하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다른 아홉을 모두 날려버리는 사람을 만날 수도 있다. 분노가 치솟는다. 인간관계의 갑질은 단순한 위계관계를 뛰어넘어 존재한다. 수평 관계에서도, 역의 관계에서도 마음 상하는 일들은 나오기 마련이다.

곤궁하고 막막할 때 귀인이 나타날 것이라는 간절함은 더욱 커진다. 아무리 힘들어도 손을 뻗어 주는 사람이 있으면 버틸 수 있다. 위안의 손, 격려의 손, 도움의 손을 내밀어 주는 사람이 귀인이 된다. 종교의 절대자가 될 수도 있고, 어느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손을 뿌리치는 어리석음, 내 편이 아니라고 닫아버리는 편협함, 그리고 타인이 간절히 내미는 손을 외면하는 냉정함은 더 쉽게 찾아온다. 나도 바쁘고, 나는 더 힘들다는 생각은 더 쉽게 정당화된다.

5월의 봄이 화창해지면서 찾아오는 일련의 기념일들은 주변 사람들을 되돌아보게 한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을 거치면서 그동안 나를 도와준 사람들, 그리고 내가 챙겨야 할 사람들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고 감사의 뜻을 전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럴 때면 문득 나는 주위 사람들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나의 귀인은 누구였는지를 되물어보게 된다. 내가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귀인이 있었을 수도 있고, 혹여 내가 부족함을 채워주지 못하고 나무라기만 한 사람도 있었을지 모른다.

세상에 아프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힘들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막막한 미래가 두려운 청춘들도 있고, 아파도 소리 내지 못하고 끙끙거리는 어른들도 있을 것이다. 그 모두가 귀인을 만나 한 시름을 덜고 행복해지기를 바라고 있다. 위인이 되기는 어려울지라도, 어쩌면 우리는 어느 누군가에게는 귀인이 되어 줄 수 있다. 종종 내가 잘 알고, 간단히 풀 수 있는 일들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몇 날, 몇 달간의 고민이고 난관일 수 있고, 또 그 반대의 입장이 될 수도 있다. 그냥 얘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힘을 줄 수도 있다. 어쩌면 지금 가까운 주위에 간절히 내밀고 있는 손들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걸 잡아줄 수 있다면 그 보답으로 길한 방향에서 나만의 귀인을 만날지도 모른다. 이번에는 놓치거나 지나치지 않고 꼭 붙잡을 그런 귀인을 다시 기다리게 된다.

이재승 고려대 국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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