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보다 ‘각자’가 대세가 되는 사회
조직에 속해도 뿔뿔이 흩어지는 개인
삶은 고통이지만 포기할 수 없는 자유
이상적인 민주주의의 모델 가운데 ‘풀뿌리’ 민주주의가 있다. 작은 풀뿌리들이 모두 평화롭게 뿌리를 내리며 서로 사이좋게 살 수 있다는 모델이다. 민주주의를 이상으로 이해하면 풀뿌리의 비유가 적절하게 보일 수 있다. 또는 거꾸로 풀뿌리라는 비유가 민주주의라는 이상을 평화적으로 표현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게 그 둘은 서로를 떠받들어 주었다. 역사적으로도 그런 이상은 꽤 해 볼 만한 일이었다. 자유로운 시민이 각자 자율적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사회는 가능하게 보였다.
그러나 이 모델은 실제로는 식물의 생태계를 반영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그것과 어긋난다. 작은 풀들 위에 얼마든지 큰 풀과 나무들이 자라면서 햇빛을 차지할 수 있고, 심지어 키 작은 나무들도 키 큰 나무들 아래에서는 빛을 쬐기 힘들다. 그 모델은 처음부터 이런 문제를 고려하지 않은 채 풀을 기본으로 삼았고, 따라서 일반적인 식물의 생태계가 아니라 제한적인 식물성을 그리고 있다. 생태적으로도 일반적이기보다는 제한적인 모델이다.
그런 모델은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 않은 듯하다. 물론 그것이 전적으로 폐기된 것은 아니지만, 점점 믿기 어려워졌다. 여러 나쁜 일들이 쌓이고 쌓였다. 치열한 교육경쟁, 괜찮은 일자리의 부족과 높은 주거비용, 결혼도 포기하고 아이 낳기도 포기하기. 과거엔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는 일이 특별한 일이 아니었지만, 이젠 그렇다. 그렇다고 좀 넉넉한 자들은 안전한가? 그렇지 않다. 이들도 나름대로 삶의 리스크에 벌벌 떤다.
그래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던 ‘풀뿌리’ 민주주의라는 비유는 어느 순간부터 시들해졌다. 몽상이라고 파악되었다는 점에서 그것의 쇠퇴는 긍정적이지만, 갈등과 분열이 확산되고 있다는 점에선 부정적이다. 어쨌든 이 긍정적이면서도 부정적인 신호를 함께 파악해야 할 필요가 있다. ‘뿔뿔이 민주주의’라는 표현은 그것을 시도할 수 있는 관점이다. ‘뿔뿔이’라는 표현에 다소 삐딱한 면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혼밥’과 ‘혼술’이 어느 순간 정상적인 일이 된 것이 상징적이다. 1인 가구도 점점 대세로 굳어진다.
물론 그렇다고 사회가 그냥 구속력이 없는 허깨비가 되었다는 말은 아니다. 사회조직의 구속력이나 규모는 마냥 커지고 있다. 정부조직이든 글로벌 회사조직이든, 절이든 교회든 모두 크고 거창한 사업을 벌인다. 그러나 그 조직들이 개인들을 정말 사회로 통합시키고 있을까? 그런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개인들은 일자리와 소속감을 위해 조직에 가입하기는 하지만, 실제로 그 조직이 자신의 삶을 구해 주거나 사회로 통합시켜 준다고 믿지는 않는다. 커지는 조직에 소속되기는 하지만, 개인들은 점점 뿔뿔이 흩어지고 있으니, 이런 아찔한 아이러니가! 사회와 개인 사이엔 블랙홀이 생기고 있다. 마치 우주에서처럼.
냉정하게 말하면, 사회는 개인들이 공동체의 틀 안에서, 그것에 의해, 그리고 그것을 위해 살기 바라지 않는다. 사회는 점점 그런 책임을 짊어지려고 하지 않고, 또 짊어질 수도 없다. 오히려 사회는 얄궂게도 사람들을 뿔뿔이 흩어지게 만드는 개별화 과정을 통해서 자신을 조직하고 있다. 사회조직에 참여하되, 각자는 자신의 삶을 책임져야 한다. 길어진다는 수명의 잉여를 각자 알아서 관리해야 한다. 국민연금에 들든 안 들든, 따로 또 개인연금을 어떤 수로 들든 각자의 몫이다. 자신을 실현하는 일도, 자기실현을 포기하는 일도 각자의 몫이다. 무서운 일이다.
물론 사회도 어느 정도는 한다. 그러나 명백한 한계가 있다. 여기서 각자 자신의 삶을 책임지는 모습을 단순히 비판하면서, 다시 풀뿌리 민주주의로 돌아갈 수 있을까? 힘들 것이다. 어쨌든 너무 이념에 사로잡힐 필요는 없다. 팩트는 이것이다. 각자에게 자신이 책임져야 할 삶은 고통이지만, 동시에 포기할 수 없는 자신의 자유로 굳어지고 있다. 오래 지속되고 있는 과정이며, 더 심해질 수도 있다.
김진석 인하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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