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해 전, 시국 사건이 쏟아지던 시절이었다. 나도 사무실을 운영하랴 길에 나가랴 밤낮으로 버둥거리던 어느 날, 함께 활동하던 A변호사님과 이야기를 나누다 깜짝 놀란 적이 있다. A변호사님은 헌신적으로 인권옹호 활동을 하던 분이셨는데, 같은 인권변호사인 B변호사님 얘기가 나오자 불쑥 “그분 하나도 안 바빠요. 하는 것도 없는데.”라고 하신 것이다.
그 B변호사님은 다른 인권 분야에서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만큼 활동하고 계셨다. 당시 진행 중인 중요 사건도 한두 건이 아니었고, 토론회에도, 행사에도, 현장에도, 꼭 필요한 분이었다. 생업이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맨 앞에 선 사람이었다. 그렇기로는 이 분이나 저 분이나 마찬가지였다. 다만 두 사람은 가끔 지나가다 마주치는 것 외에는 활동영역이 전혀 겹치지 않았다.
“하는 것도 없는데”라는 말에 악의는 전혀 없었다. 악의가 없는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하느냐 반문할지 모르지만 사실 대부분의 사람은 딱히 악의도 선의도 생각도 없는 그냥 아무 말을 상당히 많이 한다. 그것도 아마 그런 말 중 하나였다. 말한 사람은 아마 오래 전에 잊어버렸으리라. 그러나 나는 그날 밤, 괜히 내가 분하고 억울해 잠을 설쳤다. 어떻게 저토록 애쓰고 있는 사람을 두고 하는 것이 없다고 할 수 있지? 그것도 같은 처지면서?
답은 어렵지 않다. 보이지 않은 것이다. 대단한 이유를 댈 필요도 없이 물리적으로만 생각해도 답이 나온다. 시간이 없으면 볼 수가 없다. 내 눈앞의 일을 해내기에도 빠듯하다. 오히려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많으면 많을수록, 중하면 중할수록 그 너머가 보이지 않을 때도 있다. 보지 않으려고 해서가 아니라 도무지 더 볼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이미 우리 사회의 이슈 하나의 크기가 한 사람이 여러 가지에 깊이 있게 관여하기에는 너무 복잡하다. 그러니 자연스레 무언가에 열중하고 관심을 가질수록 역으로 그 외 이슈에서는 누가 얼마나 일하는지는 잘 모르게 된다.
물론 이것은 답의 절반일 뿐이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보이지 않는 것을 아예 없다고 착각하기가 아주 쉬울 뿐이다. 이 또한 대단한 악의나 선의가 없어도 생겨나는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안 보이면 모른다. 모르는 것은 없는 것이 되기 십상이다. 청소년 참정권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이 청소년 참정권을 꾸준히 주장하면서 청소년에서 성인이 되어 간 사람을 상상할 수 있을까? 여성 인권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이 여성인권 운동이 아예 직업인 사람의 일과를 구체적으로 그려볼 수 있을까? 그리고 구체적으로 그려지지 않는 미지의 영역을, 보이지 않는 타인의 생활과 투쟁을 없는 양 여기기는 또 얼마나 쉬운가?
이 착각 내지 착시에는 심지어 편안한 데가 있다. 내가 버둥거리는 만큼 남들도 각자의 영역에서 버둥거리고 있다고 인식하는 것보다, 내가 힘든 만큼 남들도 힘든데 세상이 여전히 이 모양 이 꼴이라고 생각하는 것보다, 어느 선 바깥의 세상과 사람에 대한 상상이나 걱정을 아예 삭제하는 편이 안온하다. 잘은 모르지만 정신건강에도 좋을 것 같다.
그러나 그러면 안 된다.
그러면 안 된다.
모든 자리에서 모든 사람이 무언가를, 무엇이든 하고 있다고 믿어야 한다. 안 보여도 믿어야 한다. 뭔지 몰라도 문제가 있다면 그 문제에 ‘하는 일도 있는’ 사람, ‘지금까지 어디 가서 뭐 하다 온’ 사람이 있다고 믿어야 한다. 보이지 않으면 우선 내가 못 봐서라 생각하고, 둘째로도 그저 내가 몰라서라 생각하고, 보이지 않는 사람은 다른 곳에 가 있고, 보이지 않는 자리에는 다른 사람이 서 있다고 믿어야 한다. 이 믿음이 우리를 지탱한다고, 나는 믿는다.
정소연 SF소설가ㆍ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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