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합 등 소비자 피해 보상 제도
과징금 활용하는 재원 방법 놓고
기재부, 공정위 반대에 논의 공전
정부안으로 후퇴하는 분위기
정부 예산으로 예방활동에 그쳐
공정거래위원회는 지난 2012년 화학비료 가격을 담합한 남해화학 등 13개사를 적발했다. 이들은 무려 16년 간 농협 등이 발주한 화학비료 입찰에서 가격과 물량 등을 사전에 합의했다. 공정위는 총 828억원의 과징금을 부과, 담합에 따른 부당이득을 국고로 환수했다. 그러나 정작 비싼 돈을 내고 비료를 산 농민들은 별다른 배상을 받지 못했다. 이에 농민 피해자 1만8,000여명이 민사소송을 제기했지만 수년 째 법적 공방만 이어지고 있다. 농민들은 변호사 수임료는 물론 담합에 따른 부당이득을 계산(감정)하는 데만 수억원을 써야 했다. 이 과정에서 정부의 지원은 한 푼도 없었다.
담합 등 기업의 불공정거래 행위로 인한 소비자 피해를 직간접적으로 보상하기 위한 ‘소비자권익증진기금’ 설치 방안이 1년째 헛돌고 있다. 정부 부처의 소극적 태도에 대통령의 대선 공약마저 유명무실해지고 있다.
지난해 4월 당시 문재인 대통령 후보는 소비자 피해구제 공약으로 ‘소비자 권익증진기금(가칭) 설치’를 발표했다. 과징금과 민간 기부금 등을 재원으로 삼아 기업의 불공정거래행위로 피해를 본 소비자에게 피해보상(생계곤란)이나 소송지원 등을 지원하겠다는 취지였다. 공정위가 기업에 부과한 과징금(2016년 8,038억원)이 모두 국고로 귀속(일반 행정지출), 제재의 ‘과실’이 정작 피해자인 소비자에게 한 푼도 사용되지 못하는 괴리를 좁히기 위한 방도였다. 문 대통령이 당선되자 공정위는 이에 대한 검토에 착수했고, 국정기획자문위원회의 ‘국정운영 5개년 계획’에도 기금의 설치 방안이 담겼다.
그러나 이후 관련 논의는 좀처럼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가장 큰 걸림돌은 재원이다. 기재부와 공정위 모두 과징금을 기금의 재원으로 활용하는 방안에 난색을 표하고 있다. 두 부처는 매년 변동폭이 큰 과징금은 ‘안정적인 재원조달’이란 기금의 설립요건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를 내세우고 있다. 공정위의 과징금 규모는 2013년 4,184억원, 2014년 8,043억원, 2015년 5,899억원 등 차이가 났다. 더불어민주당 관계자는 “특히 기재부가 강하게 반대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기금 사용처를 결정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이견이 크다. 공정위는 기금으로 피해자를 직접 구제하는 방안이 ‘피해를 유발한 행위자가 배상해야 한다’는 손해배상 대원칙에 어긋난다는 입장이다. 공정위는 미국의 ‘컨슈머리포트’ 같은 정보제공 사업 등을 통해 소비자 역량을 강화하는 데 기금을 쓰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 반면 대선 공약의 토대가 된 김기식 전 민주당 의원의 ‘피해자 지원기금법’(2014년)이나 제윤경ㆍ박정 의원의 ‘소비자기본법 개정안’은 모두 직접적인 소비자 피해 구제에 방점을 찍고 있다.
결국 소비자 권익증진기금 논의는 대선 공약보다 후퇴하는 분위기다. 실제 지난해 말 정무위 심의 과정에서 공정위는 “(박근혜 정부 때인 2016년 11월 발의한) 정부안(소비자기본법 개정안)에 동의한다”고 밝혔다. 정부안은 예산으로 기금을 조성해 소비자 피해예방 사업(교육ㆍ홍보ㆍ연구 등)에 활용하는 게 골자다. 그러나 익명을 요구한 한 국책연구기관 관계자는 “과징금이 아닌 정부 출연금을 재원으로 한다면 굳이 기금을 조성할 필요 없이 지금 하고 있는 관련 사업예산을 확충하면 된다”고 꼬집었다. 이황 고려대 교수는 “기금은 부당이득을 소비자들에게 효과적으로 돌려줄 수 있는 통로가 될 것”이라며 “민사소송 체계상 소비자들이 정당한 피해를 보상 받을 길이 막혀 있는 상황에서 그 공백을 메워줄 기금 논의가 크게 후퇴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라고 말했다. 세종=박준석 기자 pj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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