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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투신? 떠밀렸나?… 일본 시의원 사망 진실은

입력
2018.05.13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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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투신? 떠밀렸나?… 일본 시의원 사망 진실은

※ 편집자 주 : ‘일본 미제사건 갤러리’는 일본의 유명 미제 사건을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아키요 아사키의 시의원 선거용 포스터. 일본 온라인 커뮤니티
아키요 아사키의 시의원 선거용 포스터. 일본 온라인 커뮤니티

아스팔트 바닥 위에 쓰러져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피를 쏟아내던 여성은 한사코 도움의 손길을 거절했다. “구급차를 부르겠다”는 말에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1995년 9월 1일 오후 10시30분. 도쿄 히가시무라야마(東村山) 경찰서로 신고 한 통이 접수됐다. 히가시무라야마역 동쪽 5층짜리 L빌딩 입구 앞에 한 여성이 쓰러져 있다는 것이다.

신고자는 이 건물 1층 프랜차이즈 햄버거 가게의 점장 A씨였다. 여성은 신고 1시간 뒤인 밤 11시 30분 방위성 산하 방위의과대 응급실로 옮겨졌지만 결국 사망했다. 심한 출혈로 손 쓰기 너무 늦은 상태였다. 여성의 이름은 아키요 아사키(朝木明代ㆍ당시 50세ㆍ사진). ‘시민신문’이라는 지역 매체를 운영하는 언론인이자, 히가시무라야마 시의회에서 3선을 한 중진 의원이었다.

경찰 조사 결과, 아키요는 L빌딩 5층과 옥상 사이 난간에서 투신한 것으로 확인됐다. 빌딩 5층에는 아키요의 사무실이 있었다. 경찰은 같은 해 12월 사건을 투신 자살로 마무리했다. 그러나 아키요의 유족은 반발했다. 죽음에 거대한 배후 세력이 존재한다고 목소리 높였다. 그들이 지목한 곳은 일본의 종교단체 A재단이었다.

종교단체에 맞서 싸운 의원

정치를 시작한 1982년 이래 아키요의 삶은 ‘A재단과의 투쟁’으로 요약할 수 있었다. 아키요는 정치 활동 대부분을 A재단 내부 문제점 지적과 탈퇴 회원 구제에 집중했다. 사무실로 매일 같이 정체 모를 협박 편지가 쏟아졌다. 그럼에도 아키요는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갔다. 사망 당일 아키요가 시의회 사무국을 찾아 제출한 진정서의 제목은 ‘종교 법인 법 및 관련 세법의 근본을 개정하는 진정(宗教法人法及び関係税法の抜本改正を求める陳情)’이었다. 투신 1시간 전에도 이틀 뒤 열릴 A재단 문제를 다루는 심포지엄의 발표 자료를 준비하고 있었다. 유족은 이런 점을 들어 아키요의 사망 원인에 의혹을 제기했다. 아키요는 자살한 게 아니라 “자살 당했다”는 것이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가장 의문이 남는 건 투신 당시 정황이었다. 생전 아키요와 막역한 사이였던 야노 호즈미(矢野穂積) 시의원에 따르면, 투신 당일 오후 9시쯤 아키요의 사무실을 찾았을 때 형광등은 전부 켜져 있었고, 에어컨도 가동되고 있었다. 컴퓨터 화면에는 아키요가 심포지엄에서 발표할 워드 문서가 열려 있었다. 사람만 ‘증발’하듯 사라진 상황에 이상함을 느낀 야노는 아키요의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아키요가 받았다. 집에는 아키요 뿐이었다. 아키요는 “기분이 별로다. 조금 쉬다 가겠다”는 말을 남기고는 전화를 끊었다. 마지막 전화였다.

야노의 진술대로라면, 투신 당시 아키요의 행적은 이렇게 추정할 수 있다. 자택에서 휴식하던 그는 어떤 이유에서 심경의 변화를 느끼고 맨발로 집을 나와 사무실 건물 5층으로 이동, 난간에 올라 몸을 던졌다. 투신 장소에선 신발이 발견되지 않았다. 어쩌면 누군가에 의해 신발을 신을 새도 없이 사무실로 옮겨진 아키요가 강요 또는 강제로 투신 했음을 방증하는 증거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경찰은 아키요에게 충분한 자살 동기가 있다며 이 같은 주장을 일축했다. 아키요가 그 무렵 절도 혐의로 입건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절도 혐의에 알리바이 조작까지

1995년 6월 29일.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성이 히가시무라야마역 인근 옷 가게 ‘스틸(STILL)’에 모습을 나타냈다. 티셔츠 한 벌을 겨드랑이에 숨기고 가게를 빠져나가려던 찰나, 가게 주인의 아내 B씨가 이 장면을 목격했다. “도둑이야!” B씨의 외침에 여성은 당황했다. B씨가 도둑질을 추궁했지만 여성은 끝까지 “내가 한 게 아니다”라며 잡아뗐다. B씨가 잠시 한 눈 판 사이, 여성은 부리나케 달아나 거리의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B씨는 여성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 지역 시의원이었기 때문이다.

경찰은 B씨가 진술한 50대 여성의 옷차림과 같은 날 한 은행에서 촬영한 폐쇄회로(CC)TV 영상 속 아키요의 모습을 대조한 결과, 두 사람이 동일인이라고 판단했다. 아키요는 자신의 알리바이를 증명하기 위해 B씨가 주장하는 범행 시간에 동료 야노 의원과 레스토랑에서 식사 중이었다며 그 증거로 시간대가 적힌 영수증을 제출했다. 문제는 이 영수증이 조작됐다는 점이었다. 경찰 수사로 궁지에 몰린 아키요는 동료 야노와 짜고, 자신이 그 시간대 옷 가게에 가지 않았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지인의 레스토랑을 방문, 날짜와 시간이 조작된 영수증을 사후 발급 받았다. 그러나 경찰은 바보가 아니었다. 레스토랑이 영수증과 별개로 작성한 사본 장부와 레스토랑 직원들로부터 그 당시 “아키요를 보지 못 했다”는 진술을 확보한 경찰은 1995년 7월 12일, 아키요를 불구속 입건하고, 해당 사건을 도쿄 지검에 기소 의견으로 송치했다.

아키요는 “정치적 보복”이라며 반발했다. 옷 가게 주인, 경찰, 검찰이 한통속으로 자신에게 누명을 씌웠다고 주장했다. 특히 그는 이들이 모두 A재단 회원이라며, 자신이 재단에 비판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재단 측이 수를 써 함정에 빠뜨린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알리바이 조작까지 확인된 마당에 여론이 아키요에 호의적일리가 없었다. 경찰은 아키요가 검찰 소환조사를 이틀 앞두고 자신의 사무실 건물에서 투신한 사실에 주목했다. 조사에 부담을 느낀 그가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것이다.

팔뚝에 든 멍, 부검 감정서가 말해준 것은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부검 감정서는 자살과 타살, 두 가지 가능성을 함께 언급하고 있었다. 먼저 자살의 가장 강력한 증거는 머리에 외상이 없다는 점이었다. 누군가에 떠밀려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머리에 상처가 남는 게 일반적이다. 무거운 머리부터 포물선 모양으로 떨어지기 때문이다. 자살은 그 반대다. 엉덩이, 팔, 다리 등 몸 뒤편에 상처가 집중된다. 하지만 아키요의 경우엔 머리가 깨끗했다. 대신 다리 골절과 오른쪽 대퇴부부터 엉덩이에 걸쳐 커다란 멍이 있었다. 또 부러진 갈비뼈가 폐를 찔러 출혈도 상당했다. 투신한 사람에게 발견되는 전형적 특징이었다.

반면 유족은 아키요의 팔 뒤편에 남은 멍이 타살의 강력한 증거라고 주장했다. 누군가에 강제로 팔을 잡혀 떨어지는 과정에서 생긴 ‘저항흔’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투신한 난간의 높이(150㎝)도 문제 삼았다. 아키요의 키(160㎝)를 고려하면, 제3자 도움 없이는 투신이 불가능하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선 난간이 3단(0.9m, 1.3m, 1.5m)으로 구성돼 있기 때문에 충분히 투신이 가능하다는 주장도 있다. 경찰 또한 이 점을 바탕으로 아키요의 사건을 투신 자살로 마무리했다.

법원도 경찰 측 주장에 사실상 손을 들어줬다. A재단은 유족과 유족들의 허위 주장을 게재한 잡지를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해 모두 승소했다. 일본 법원은 A재단이 아키요의 사망사건과 전혀 무관하며, 유족과 해당 잡지에 손해배상 및 사과광고를 게재하라고 판결을 했다. 하지만 유족은 여전히 아키요가 타살 당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양원모 기자 ingodzone@hankookilbo.com

송영민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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